포은과 삼봉 정도전

[황원갑, 소설가]

연일정씨홈페이지 www.yuniljung.com



포은은 정도전보다 다섯 살이 위였다.과거에도 2년 앞서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한두 살 비슷한 또래가 아니라 다섯 살이나 많은 선배였다. 정도전이 목은 이색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을 때 포은 이미 목은 이색을 대신하여 강의를 할 정도의 대선배였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일생을 살펴볼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와 그의 아들 태종 이방원李芳遠, 그리고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세 사람이다. 간혹 가다가 모르는 사람들은 정몽주와 정도전은 같은 정씨이면서 왜 서로 갈라져 원수가 되었느냐고 묻는다. 참으로 어리석은 소리다.

정몽주는 나라 정鄭자 영일迎日 정씨이고 정도전은 봉화奉化 정씨이다.정도전은 경상도 영주에서 태어났다. 일설에는 단양팔경丹陽八景으로 유명한 충청도 단양 도담에서 태어났다고도 한다. 도담은 정도전의 외가가 있던 곳이다. 그의 호 삼봉은 도담삼봉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는데, 또 일설에 삼봉은 정도전이 한때 집을 짓고 살던 서울 삼각산을 가리킨다고도 한다.
정도전의 자는 종지宗之. 그의 아버지 운경云敬이 젊었을 때 관상쟁이가 보더니 앞으로 10년 뒤에 혼인하면 재상을 낳을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운경이 금강산에 들어가 10년 동안 수양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도담삼봉에 이르렀을 때 비를 맞았다. 그러다가 어느 민가에서 비를 피하다가 우씨 처녀를 만나 혼인하고 정도전을 낳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씨 처녀는 첩의 소생이었다. 정도전도 나중에 서녀와 혼인했으니 묘한 인연이다. 하지만 조선왕조와는 달리 고려왕조 때에는 서얼庶孼의 과거를 막는 법이 없었기에 정도전은 과거를 볼 수 있었다.
정도전의 집은 대대로 영주 고을의 호장戶長, 즉 향리鄕吏였다. 그의 5대조 공미公美가 봉화 정씨의 시조인데, 그의 아버지 운경은 충숙왕 때개경에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하여 뒷날 형조판서, 오늘로 치면 법무부장관을 지냈다.정도전은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개경에 올라왔다. 아버지는 예전에 안동향교에서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아버지 이곡李穀과 함께 공부한 인연이 있었다. 그런 인연에 따라 정도전은 이색의 문하에서 이숭인李崇仁·이존오李存吾 김구용金九容·김제안金齊顔·박의중朴宜中·윤소종尹紹宗 등과 함께 유학儒學을 배웠다. 정도전은 정몽주보다 2년 늦은 공민왕11년(1362년) 20세 때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그 이듬해에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정8품 청주사록에 임명되었다.그러나 공민왕 15년(1366년) 정7품 통례문지후 때 부모상을 만나 공민왕 18년 탈상 때까지 3년상을 치렀다. 정도전은 공민왕 16년(1367년) 성균관이 재건되고 목은 이색이 대사성이 되자 성균관학관이 되었다. 또 그 이듬해 신돈辛旽이 처형될 때에는 정6품 예의정랑에 성균관태상박사를 겸직했다.
공민왕이 1374년 재위 23년 만에 시해 당했을 때 정몽주는 37세, 정도전은 32세였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자 조정은 이인임李仁任 등 친원 수구파가 장악하였다. 정몽주와 정도전은 여러 가지로 뜻이 잘 통했으나 나중에 정도전이 조준趙浚·윤소종 등과 더불어 이성계의 심복이 되어 조선왕조의 개국공신이 되고, 정몽주는 고려조의 충신이 되어 서로가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정몽주가 성균관 대사성 때인 1374년 그의 나이 서른아홉 살 때 공민왕이 암살당하자 정국은 경색되었다. 친원 반명파가 또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그런데 일이 공교롭게 되느라고 김의金義라는 자가 명나라 사신을 죽이고 북원으로 달아나는 사건이 벌어졌다. 공민왕 시해사건에 대해 명나라 황제에게 해명해야 하는 판에 명나라 사신까지 죽였으니 일이 엎치고 덮친 격이었다. 또 누구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려고 나서지 않았다. 그때 정몽주가 나섰다.

“근래의 변고를 빨리 명나라에 알려 중국으로 하여금 의혹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어찌하여 미리 겁을 먹고 등을 돌려 백성들에게 화가 미치는 일을 자초할 수 있겠습니까?”

그해에 북원北元에서 사자가 왔는데 고려에 보내는 조서의 어조가 매우 오만불손했다. 하지만 당시의 권신 이인임과 지윤池奫 등이 이를 기화로 다시 원나라와 친하고 명나라를 멀리하자고 주장했다. 이에 정몽주가 박상충朴尙衷·김구용·정도전 등과 더불어 12명이 연명으로 상소하여 이의 불가함을 역설했다. 그러나 이인임과 지윤 등 친원파는 요지부동이었다. 이인임은 정몽주와 정도전 등 21명을 파직시키고 멀리 남쪽으로 귀양 보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때 정몽주는 경상도 언양으로, 정도전은 전라도 나주로 유배를 당했다. 정몽주는 유배지 언양에서 나주 회림에서 귀양살이하는 후배 정도전에게 위로의 편지와 함께 <맹자孟子> 한 권을 동봉해 보냈다. 나중에는 정적政敵으로 갈라서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정몽주는 정도전을 시대를 잘못 타고난 불우한 인재, 아까운 후배로 생각하고 알뜰히 챙겨주었던 것이다.
정도전은 우왕 6년(1380년)에 유배가 풀려 서울 삼각산 기슭에 삼봉재三峰齋를 짓고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이듬해에 서재가 철거당하자 부평으로 이사했으나 그곳도 강제 철거를 당하자 다시 김포로 이사하였다. 이래저래 빨리 망해버렸으면 좋은 나라, 썩어빠진 나라의 현실에 환멸을 느낀 정도전은 다시 해가 바뀐 우왕 9년 가을에 동북면으로 달려간다. 그는 함주의 동북면 도지휘사 군영으로 이성계를 찾아가 그때부터 그의 심복이 된다. <용비어천가>에 그 이야기가 나온다.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를 찾아 함주 막사로 갔다. 그때 태조는 동북면 도지휘사로 있었다. 태조의 호령이 엄숙하고 대오가 질서정연한 것을 보고 정도전이 은근히 말했다.

“참 훌륭합니다. 이런 군대를 가지고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태조가 무슨 뜻이냐고 묻자 정도전은 이렇게 둘러댔다.

“동남방의 근심인 왜적을 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정도전의 역성혁명 사상은 그 무렵부터 싹텄는지도 모른다. 그때 정도전에게 이성계를 소개해준 사람이 한때 이성계의 조전원수로 왜구와 싸웠던 정몽주였으니 인간의 운명은 참으로 기기묘묘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해 1383년에 이성계를 만나 그의 심복이 된 정도전은 조선왕조가 선 뒤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에게 맞아 죽던 1398년까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공양왕 4년(1392년) 6월. 최영崔瑩에 이어 마지막 기둥인 정몽주마저 참살당하고 천하가 이성계 일파의 손안으로 들어가자 공양왕은 국사고 뭐고 자신의 목숨부터 건져야 할 위기를 절감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만고에 없던 신하와의 동맹 제의였다. 그때 공양왕이 만든 교서는 이런 내용이다.

경(이성계)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찌 이에 이르렀겠는가. 경의 공덕을 내가 어찌 잊으랴. 황천후토皇天后土가 위에 있고 곁에 있으니 세세자손이 서로 해를 끼침이 없으리라. 내가 경에게 빚진 것이 많아서 이와 같이 맹약하노라.

고금에 없던 동맹이요 맹약문이었다. 하지만 이성계는 이 맹약문의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등극하여 조선왕조를 개창하니 1392년 7월 17일이었다. 그때 태조 이성계의 나이 58세. 이로써 태조 왕건이 창업한 고려조는 34대 474년만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버렸다. 정몽주를 모살한 자들은 이성계를 중심으로 조선왕조의 건국 세력이었다. 그들은 <태조실록> 태조 원년 12월 임술 조에서 정몽주를 이렇게 ‘간신’이라고 폄훼했다.

간신 정몽주는 전하(이성계)의 비호 덕분에 총재○宰가 되었음에도 손수 나라의 정권을 잡고서는 왕씨의 뜻에 맞추어 대간臺諫을 사주하며 신(조준)과 정도전·남은 등이 전하의 심복이 되었다고 말하면서 틈을 이용하여 계책을 부리고 죄를 꾸며 법강法綱에 끌어넣어 먼저 내쫓은 뒤, 전하를 도모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정국도 바뀌었다. 또한 정몽주에 대한 인식도 바뀌었다. 이른바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이 숙청되고, 이방원이 세자로 책봉되면서 정국이 변화하였던 것이다.

태종은 즉위 직후 정권의 안정을 위해 산림의 선비들을 등용하고, 여러 정치 세력을 포용하였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정몽주에 대한 평가도 점차 충의와 절의지사로 바뀌게 된다. 비록 나라는 바뀌었지만 왕실이 신하들의 충성심을 요구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모살한 전조前朝의 충신도 돋보이게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다음은<태종실록> 태종 원년 1월 갑술 조의 기록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전조의 시중인 정몽주는 본래 한미한 선비로 오로지 태상왕太上王(이성계)이 천발薦拔한 은혜를 입어 대배大拜에 이르렀으니 그 마음은 어찌 태상왕에게 후히 갚으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또 재주와 식견이 밝았으니 어찌 천명과 인심이 돌아가는 바를 알지 못했겠고, 어찌 왕씨의 위태하고 망해가는 형세를 알지 못했겠으며, 어찌 자신의 몸을 보존함을 알지 못했겠습니까. 그러나 오히려 섬기던 곳에 마음을 오로지하고 그 절조를 변치 않아 목숨을 잃는데 이르렀으니 이것은 이른바 큰 절개에 임해 빼앗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그 자손을 녹용錄用하여 후세 사람들을 권면하소서.
나중에 편찬한 <고려사> ‘열전’에서 그들은 정몽주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이 기사는 전과 비교하면 훨씬 공정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정몽주, 자는 달가, 영일인이다. 지주사 정습명의 후손이다. …하늘로부터 받은 지고至高함이 호매豪邁하고 절륜絶倫하여 충효의 큰 절개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을좋아하여 게으르지 않았고 성리학을 궁구함에는 깊이 얻은 바가 있어 태조(이성계)가평소 기중器重하게 여겨 매번 전쟁에 나갈 때에는 반드시 그와 함께 갔고, 여러 번 천거하여 함께 재상에 오를 수 있었다. 이때는 나라에 변고가 많아 기무機務가 번거롭고 많았는데도 몽주는 큰일을 처리하고 큰 의심을 결단하는데 성색聲色을 움직이지 않고도 좌우에 응답을 얻어 모두 그 마땅함을 얻었다. 시속時俗이 상제喪祭에서 오로지 불문佛門의 법을 숭상함에 처음으로사서士庶로 하여금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모방하여 가묘家廟를 세우고 선사先祀를 받들게 하였다. …또 금곡金穀을 출납하는 도평의사사가 백첩白牒을 시행하여 일에 외람됨이 많아지자 비로소 경력·도사를 설치하여 출남을 기록하게 하였다. 또 도성 안에는오부학당五部學堂을 세우고 밖에는 향교鄕校를 설치하여 유술儒術을 일으켰다. 그밖에의창義倉을 세워 궁핍함을 진휼하고, 수참水站을 세워 조운漕運을 편리하게 하니 이 모두는 그가 계획한 것이다.
정몽주는 정도전보다 다섯 살이 위였다. 과거에도 2년 앞서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한두 살 비슷한 또래가 아니라 다섯 살이나 많은 선배였다. 정도전이 목은 이색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을 때 정몽주는 이미 목은 이색을 대신하여 강의를 할 정도의 대선배였다. 정도전은 정몽주로부터 유학사상을 정확히 이해하는데 큰 가르침을 받았으며, 나중에 이렇게 쓰기도 했다.
정몽주 선생과 출입을 같이 하고, 그 뒤 오랫동안 함께 지내며 보고 느낀 바가 깊었으니 선생은 내가 가장 잘 안다.
두 사람이 한층 가까운 사이가 된 것은 공민왕 때 성균관이 재건되어 같이 성균박사로 임명된 이후였다. 또 둘이 같은 친명반원파로 몰려 이인임 일파에 의해 귀양을 갔다. 나중에 귀양이 풀려 정도전이 방황할 때 명나라 사신으로 가게 된 정몽주가 정도전을 자신의 서장관으로 추천하여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고, 정도전은 그 공로로 종3품 성균좨주겸 지제고로 발탁되어 재지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같은 친명반원파요, 유학을 통한 반불교 개혁파였으나 목은 이색이 공민왕 사후 창왕昌王을 옹립하면서 정몽주는 온건 개혁파로, 정도전은 역성혁명파로 갈라서게 되었던 것이다.
정도전이 이성계에게 몸을 의탁한 것도 사실은 정몽주의 추천에 의해서였다. 이성계의 조전원수로 이성계의 군사적 능력을 인정하고 있던 정몽주가 정처 없이 떠도는 정도전을 위해 이성계에게 추천해준 것이었으나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던가. 정도전은 이성계의 일급 참모가 되어 그의 역성혁명을 앞장서 도왔고, 그 과정에서 위화도 회군, 이방원의 정몽주 암살, 정권 탈취, 고려조 붕괴와 조선왕조 개국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는 굴러왔던 것이다. 태조 이성계는 술이 들어가 거나하게 취하면 이렇게 말했다.

“삼봉이 아니었다면 내가 어찌 오늘 이 자리에 앉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면 삼봉 정도전은 이렇게 응수했다.

“한 고조가 자방子房(장량張良)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자방이 한 고조를 이용한 것이옵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이성계를 내세워 자신의 꿈과 포부를 성취했다는 자신감에서나온 소리였다. <태조실록>도 이렇게 썼다.

(정도전의) 힘으로 도울 수 있는 데까지는 힘쓰지 않은 것이 없어서 결국 대업을 이루게됐으니 참으로 으뜸가는 공신이었다.

하지만 <태조실록>은 정도전을 죽인 태종 때 만든 기록이다. 정도전의 죽음을 전하면서 <태조실록>은 이렇게 정도전을 평했다.

(정도전은) 도량이 좁기 때문에 남을 시기하고, 또 겁이 많았다.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해치려 들었고, 옛날에 품었던 감정은 기어코 보복하려 했으며, 언제나 임금에게 권해서 사람을 죽여서 위엄을 세우자고 했다. 하지만 임금은 이를 다 듣지 않았다.

그러면 정도전은 어떻게 되었는가. 고려조가 망하고 자신이 설계했던 대로 새 왕조 조선이 개국된 뒤 호의호식하며 평생을 잘 살았던가. 그렇지 않았다. 정몽주가 원통하게 죽은지 6년 뒤인 태조 7년(1398년) 8월 26일에 정도전은 태조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의 손에 비명횡사하고 만다. 공교롭게도 그의 나이도 정몽주가 죽을 때와 같은 56세였다. 이방원의 궁중 쿠데타로 목숨을 잃었는데 그때 그의 네 아들 중 셋이 목이 잘리거나 자살을 하여 집안이 망해버렸다.
동생들을 죽이고 아비를 상왕으로 내쫓고 왕위에 오른 이방원. 태종은 즉위 첫해에 자기가 죽인 정몽주를 만고충신이라고 극찬하여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문충文忠이란 공신 호를 내렸지만, 역시 자기가 죽인 정도전에 대해서는 ‘만고역적’으로 몰았다. 정도전에게 씌워진 만고역적의 오명은 조선왕조 500년 내내 이어져 내려오다가 왕조 말 고종高宗 때 대원군大院君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정도전이 경복궁 설계의 공로자라면서 복권시켜 준다.
근래 정도전의 인간과 업적을 재조명하는 책과 드라마가 나왔지만, 사실 정도전의 입지에는 정몽주라는 큰 나무가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고려조의 충신이었던 정몽주와 조선조의 개국공신이었던 정도전은 사후에 이처럼 극명하게 엇갈린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나 역사의 교훈을 망각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

[자료원] : 포은공파 종보2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