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가, 포은공파종약원 부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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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망국의 대부니라. 천지 사이에서 죄를 지은 몸이니 나를 선영先塋에 묻지 말 것이며, 내외의 합장도 하지마라. 또한 내 자식들을 내 무덤 옆에 계장繼葬도 하지 마라. 내 평소에 나 자신을 죄인처럼 생각하고 살았던 본 뜻을 표시해 달라!”
고려 말의 청백한 재상 단산부원군丹山府院君 우현보는 본관이 단양, 자는 원공原功, 고려 때의 최고 관직 문하시중을 지낸 우길생禹吉生의 아들이며, 고려 충선왕 때 감찰규정監察糾正을 지낸 도학자 우탁禹倬의 손자였다. 그는 공민왕4년(1355) 23세 나이로 문과에 올라 춘추관검열에 임명되어 벼슬을 시작하였다.
이어 여러 관직을 거쳐 우왕14년(1388) 모든 국사를 주관하는 문하찬성사에 올라 순충익대좌리공신純忠翊戴佐理功臣에 책록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요동정벌을 위해 국력을 기울일 때 우현보는 좌시중으로 승차하여 개성유수를 겸해 개성 방어책임을 맡았다가, 요동 정벌에 나섰던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화살을 고려 조정으로 돌리자 우현보는 파직 당하고 말았다. 뒤에 공양왕이 즉위하자 우현보는 그의 장손자 우성범禹成範이 공양왕의 사위가 되는 인척 관계로 단양부원군丹陽府院君에 봉해져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라 국가 재정을 관장하였다. 그러나 말기 현상이 뚜렷해진 고려 말엽의 혼란한 정국 속에서「윤이尹彛와 이초李初의 옥사」사건에 말려들어 유배당하기도 했고, 대간들의 탄핵을 받아 철원으로 귀양을 가는 등 시련을 겪기도 했으나 곧 풀려나 단산부원군으로 개봉改封되어 안정을 되찾았다.
공양왕 4년(1392) 4월 마침내 이방원李芳遠 일당의 피격을 받아 포은선조께서 순절하는 사건이 터졌다. 이는 고려의 멸망과 함께 새 왕조의 시작을 예고하는 징조였다. 고려 왕조의 입장에서 보면 하늘이 무너지는 시역弑逆에 버금가는 흉해凶害였다.
우현보는 젊은 시절 학문을 같이 했고, 벼슬길에서는 함께 나랏일을 걱정했던 포은이 화를 입었다는 청천벽력같은 말을 전해 듣자 방바닥을 치며 통곡했다.
“이럴 수가… 하늘도 무심한 지고…포은이 가다니…, 그것도 나라를 훔치려는 반역자 무리들 손에!…”
입맛을 잃고 울기만 하던 우현보는 포은 선조의 유해가 큰길 돌다리 위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다는 말을 듣자 어떻게 해서든 장례를 치러야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곧장 천보산天寶山으로 들어가 작은 암자에서 수도에 전념하는 고승高僧 조암照庵스님을 찾았다. 승려 조암은 불교 경전은 물론 천문지리와 학문에도 조예가 깊어 우현보와는 학문적으로 서로 통했던 명승이었다. 우현보는 조암을 만나자마자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이보시오! 조암! 포은이 당했다는 구려!”.
“예, 빈도貧道도 들었습니다! 관세음보살”.
“이미 알고 계셨구려, 이왕 당한 일, 길바닥에 버려져있는 시신을 우리 손으로 좋은 곳을 골라 묻어 드립시다!”.
그러자 조암스님은 말했다..
“대감! 대감은 나서질 마시오, 일을 꾸민 자들의 입에 올라 화를 입을까 염려 되오, 빈도가 인부를 구해 장례를 치루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포은과 나는 어릴 적부터 친구인데다 나라 일을 두고 동고동락해 왔던 벗이었오. 내가 포은의 장례를 치러준다 하여 나까지 죽이기야 하겠오? 그렇다하더라도 나를 죽인들 나는 이미 살만큼 산 나이라 조금도 두렵지 않소!”.
우현보는 조암스님의 만류를 뿌리치고 함께 암자를 나서서 명당자리를 찾았다. 곧 수의와 관을 준비하여 대여섯 명의 인부를 구해 포은 선조의 유해를 찾아갔다. 거적에 덮여 있는 유해 앞에 준비한 제물을 차려 놓고 우현보는 즉석에서 지은 축문을 읽었다. 우현보의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렀고, 옆에서는 조암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며 청아한 목소리로 독경을 했다.
단출하나마 의미 깊은 발인제를 마치고 인부들의 운구運柩로 명당에 안장하는 일을 마치니 해는 서산에 기울었다. 우현보는 금방 만들어진 포은 선조의 묘소 앞에서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데 조암스님이 옆에서 위로했다.
“대감! 그만 돌아가시지요. 인간이 태어났다가 죽는 것은 마치 구름이 일었다가 흩어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혼탁한 정쟁政爭 속에서 꿋꿋하게 살다 가신 포은 대감은 극락정토極樂淨土에서 이제 편히 쉬실 것입니다!”
이성계 일파에서 우현보의 이런 행동을 보고 이 참에 우현보도 죽여 버리자며 흥분하는 무리도 있었다. 그러나 이방원이 말렸다.
“우현보는 의인義人이다! 포은을 장사 지내 줬다고 그를 죽인다면 민심이 우릴 떠날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었다. 이리하여 우현보는 화를 면했다.
우현보는 포은선조 보다 나이 네 살 위였다. 우현보는 포은 선조를 비롯한 이색李穡, 이숭인李崇仁 등과 학문을 통해 교류가 깊었다. 그는 조선이 개국된 이후에도 이방원의 보살핌으로 목숨은 이었으나 항상 포은 선조와 함께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부끄럽게 여겼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그를 단양백丹陽伯에 봉하고 좌명공신으로 책록하려 했으나 기어이 받지 않았다. 그는 청렴을 생활신조로 삼아 조선조에서 내린 녹미祿米는 일체 받지 않고 스스로 농사지은 콩으로 끼니를 때우니 두죽상공豆粥相公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런 우현보는 조선 개국 이듬해 청백리에 녹선 되었다.
조선 정종 2년(1400) 우현보는 68세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죽음에 이르러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나는 망국의 대부니라. 천지 사이에서 죄를 지은 몸이니 나를 선영先塋에 묻지 말 것이며, 내외의 합장도 하지마라. 또한 내 자식들을 내 무덤 옆에 계장繼葬도 하지 마라. 내 평소에 나 자신을 죄인처럼 생각하고 살았던 본 뜻을 표시해 달라!”
이리하여 우현보의 무덤은 홀로 한 마을 가운데 우뚝 솟아 자리하니 그의 무덤을 독총獨塚이라 불렀다.
우현보는 홍수洪壽·홍부洪富·홍강洪康·홍득洪得, 홍명洪命 등 다섯 아들이 있었다. 장자 우홍수는 폐위된 공양왕의 사위였던 아들 우성범이 참수당해 죽고, 본인도 정도전鄭道傳에 의해 포은 선조일파로 몰려 장살 당했다. 우홍부와 우홍강은 이방원의 뜻에 따라 벼슬까지 했으나, 우홍득·우홍명은 개국 을 외면하다가 모두 장살당하고 말았다.
[자료원] : 포은공파 종보26호, 역대 정통 청백리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