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오랑과 세오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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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화의 개요
2. 설화의 해설
3. 학술 심포지엄
4. 관련지명
5. 설화의 분석

연일정씨홈페이지 www.yuniljung.com

1. 설화의 개요  [TOP]

신라 제8대(第八代)임금 아달라(阿達羅) 왕 즉위 4년 丁酉(157)때의 일이다.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연오가 바다에 나가 해조(海藻-미역 종류)를 따고 있는데, 바다 위에 홀연히 바위(혹은 고기라고도 한다) 하나가 나타나더니 연오를 싣고 일본으로 가 버렸다. 이것을 본 그 나라 사람들은, “이는 범상한 사람임이 틀림없다.” 하고는 연오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일본 제기(帝紀)를 살펴보면 전후에 신라 사람이 왕 된 이가 없으니, 이것은 변읍(邊邑)의 소왕(小王)이고, 진왕(眞王)은 아닐 것이다.)
한편 아내인 세오녀는 아무리 기다려도 남편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자 이상히 여겨 바닷가에 나가 찾다가 남편이 벗어 놓은 신을 발견했다. 다시 바위가 나타나 세오가 그 바위 위에 올라갔더니, 바위는 또한 전처럼 세오를 싣고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은 놀라 왕에게 사실을 아뢰었다. 마침내 부부가 서로 만나게 되어 그녀를 귀비(貴妃)로 삼았다. 그런데 이 부부가 신라 땅을 떠난 뒤부터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 왕은 천문을 맡은 일관(日官)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그러자 그 일관(日官)은 “해와 달의 정기(精氣)가 우리 나라에 내려와 있었는데, 이제 일본으로 가서 이런 괴변이 생겼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곧 사신을 일본에 파견하여 두 사람을 찾으니 연오가 말하길,
“우리가 여기에 온 것은 하늘의 뜻이니, 어찌 홀홀히 돌아갈 수 있겠소. 그러나 나의 아내가 짠, 가는 고운 비단을 줄 터이니 이것을 가지고 가서 하늘에 제사하면 해와 달이 다시 빛을 발할 것이요.” 라고 말하며 그 비단을 주니, 사자가 돌아와서 사실대로 고했다. 그의 말대로 사신이 그 비단을 가지고 와서 하늘에 제사했더니 과연 해와 달이 옛날같이 빛났다고 한다. 그래서 그 비단을 어고(御庫-임금의 창고)에 간수하고 국보로 삼았다.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하고, 하늘에 제사 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했다.

[出典]三國遺事 권1, 紀異 1

2. 설화의 해설  [TOP]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설화는 박인량(朴寅亮)이 지었다고 하는 '수이전(殊異傳)' 속에 실려 있었던 설화이다. 그러나 오늘날 '수이전'은 전하지 않고, 대신 일연(一然)의 '삼국유사'와 서거정(徐居正)의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옮겨 실려 전해 온다. 이 설화는 신화의 흔적을 갖춘 우리 나라 유일의 일월 신화로써 해와 달의 생성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일월신화(日月神話)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더구나 일본 측의 자료를 보면 이 설화가 일본의 건국신화와 관계 있음도 알 수 있다. 또 우리 나라의 영일(迎日)이란 지명도 이 이야기와 관계 있다.
여기에서 연오는 태양 속에 까마귀가 산다는 양오전설(陽烏傳說)의 변음으로 볼 수 있고, 세오도 쇠오, 즉 금오(金烏)의 변형으로 볼 수 있다. 연오와 세오의 이동으로 일월이 빛을 잃었다가 세오의 비단 제사로 다시 광명을 회복하였다는 일월지(日月池)의 전설과 자취는 지금도 영일만에 남아 있다. 영일현의 영일(迎日), 즉 ‘해맞이’의 지명도 태양신화와 직접 관련이 있으며, ≪일본서기≫의 〈천일창설화 天日槍說話〉도 같은 유의 광명의 신, 즉 태양신화의 이동전설이라 할 수 있다.
우리 나라의 동남 해안과 일본의 이즈모(出雲) 지방은 역사적으로도 문화의 전승로였음을 감안해 볼 때, 그러한 문화를 따라 이동한 태양신화의 한 모습을 이 설화는 잘 설명하고 있다.
세초(비단)를 최남선은 ‘Mana’라는 말로 표현하였으며, 비단을 제사하여 광명을 회복하였고, 이 비단을 귀비고에 간직하여 국보로 삼았다고 하였다.
한편, 도기야는 ≪동국여지승람≫에 욱기야(郁祈野)라고도 하였으니, 이는 ≪경상도지리지≫ 근오지(斤烏支)의 ‘오지(烏支)’와도 음이 일치하며 일본의 지명 오키(隱岐)와도 동일하여, 연오·세오가 일본에 건너가 구연의 땅 오키(迎日)의 이름을 자기의 신왕국의 명칭으로 삼았다고도 보여진다. 이 점은 일인 나카다(中田)도 출항과 기항지를 영일만과 오키 지부도(知夫島)로 비정하고 있어 매우 흥미롭다. 결국 〈연오랑세오녀설화〉는 일찍이 우리 민족이 일본 땅을 개척하여 통치자가 되고 내왕한 문화적 사실을 원시적 태양신화의 동점설화에 붙여 상징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좋은 예화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연오와 세오도 광명을 의인화한 명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참고문헌]三國遺事, 延烏郎細烏女傳說의 由來(金昌釣, 新興 창간호, 1929), 알타이系 始祖神話延烏郎細烏女(朴時仁, 藝術論文集 5, 1966), 延烏細烏說話攷(蘇在英, 국어국문학 36, 1967), 延烏郎細烏女說話의 한 연구(李寬逸, 국어국문학 55∼57, 1972)

3. 학술 심포지엄  [TOP]

□ 제목 : 제7회 일월문화제 기념 "제1회 포항정신 문화 학술 심포지엄"
□ 주최: 포항시
□ 주관:(사)동대문화연구소
□ 일시: 2007년 10월 8일(월) 14:00
□ 장소: 포항문화예술회관 소공연장

"연오랑 세오녀는 설화가 아니라 신화이다 !"

전국유일의 해를 상징하는 장소가 바로 포항의 영일만이다 즉, 해를 맞이한다는 뜻이다. 영일은 오천읍/동해면/대송면을 합쳐서 서로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신라 경덕왕 16년 임정현(臨汀縣) 한때는 오천현(烏川縣) 이라 불려지다가 영일현으로 바뀌게된다, 물가에 임하다 가까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영일(迎日) 과 연일(延日) 혼용하여 사용하였고 같은 뜻을 내포하기도 한다. 영일이란 해를 맞이하고 , 연일이란 해를 오래도록 비춘다는 뜻이라고 해석함이 타당하다. 근기국의 시초이자 오랑우(烏郞友) 근오지(斤烏支) 해를 상징하는 오(烏)자가 많이 등장하는 우리가 흔이 알고 있는 삼족오(三足烏)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우리 고장임에 틀림이 없다.
연오는 신라 아달라왕 시기에 제를 올리는 제사장이며,상당한 권력신분을 지닌 인물로서 당시 시대의 상황을 예측한다. 그러나 왕권까지 넘나드는 신분이기에 서로 내부적 갈등으로 말미암아 바위(물고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부족 현의 왕이되고 세오녀는 왕비가 되었다. 연오랑 과 세오녀가 일본으로 떠나자 온 세계가 빛을 잃어 암흑천지가 되었고 재차 사신을 보내어 돌아 올 것을 권유하지만 일본까지 온 것도 하늘의 뜻이니 아내가 짠 비단을 가지고 가서 일월지에 제사를 올리면 광명을 찾을 것이라고 일러주었고 제를 올리자 빛이 돌아왔고 신라에서는 비단을 보관하는 장소를 귀비고라 이름을 짓게되고 이때부터 영일(迎日)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우리지역에도 세계리(世界里) 연오랑 세오녀 전설에서 온 세계(世界)환하게 비췄다고 하여 지명을 세계리라고 하였고, 광명리(光明里)또한 마을 연못에 동시에 해를 비춰진다고 하여 광명리라 하며, 문충동의 신광봉(新光峰) 일월지에서 비추어진 빛이 이곳 신광봉에 제일 먼저 비친다고 하여 신광봉이라고 전해 내려오는 지명유래이다.
포은정몽주선생의 탄생 설화에서도 해와 달이 등장하기도 한다.

4. 관련 지명  [TOP]

연오랑세오녀 부부의 출발지를 영일로 보고 그들의 도착지를 일본 은기국(隱岐國)의 지부도(知夫島)로 파악한 일본 학자의 연구도 있다. 일본의 천일창설화는 연오랑세오녀설화가 동점하여 이루어진 태양신화의 이동으로 보는 연구와 함께 도기야(都祈野)는 근오지(斤烏支)의 '오지'(烏支)와도 음이 일치하며, 일본의 지명 오키(隱岐)와도 동일한 것으로 미루어 연오랑 세오녀가 건너가 옛땅 오기(迎日)의 이름을 신왕국의 명칭으로 삼았다고 보는 한국 한자들의 연구는 태양신화 동점의 민속학적 접근과 지명의 언어학적인 접근으로 설득력이 있다.
연오랑 세오녀 설화에 등장하는 일월, 영일, 도기야 이외에도 오늘날 연일, 오천, 대송, 동해지역을 다스린 진한 12국시대의 근기국(勤耆國)과 신라 초기의 근오지(斤烏支)현, 오량우(烏良友)현의 명칭을 비롯하여 근오형변(斤烏兄邊:또는 阿等변), 오천(烏川), 연오랑(延烏郞), 세오녀(細烏女), 일월(日月), 부산(夫山), 일광(日光), 광명(光明), 세계(世界),중명(中明), 자명(自明), 오도(烏島), 금광(金光) 등은 모두 해와 해돋이를 상징하는 명칭이다.
이곳의 명칭에 유달리 많은 '오(烏)'자는 태양을 상징하는 글자이며, 고대인들은 해 속에는 세 발을 가진 까마귀가 있다고 믿어왔다. 그 까마귀를 삼족오(三足烏)라고 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모두 양중오설(陽中烏說)에 근거를 두고 있다. 양중오설은 고대로부터 신화뿐만 아니라 동양의 모든 사상, 예술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주어왔다. 까마귀는 최초의 인간이었으며, 또한 초자연적인 존재이고 권능이 있는 샤먼이었기 때문에 연오(또는 영오)와 세오는 이 고장의 통치자로서 일월지에서 제의를 주제 하는 사제자일 수도 있다.

□ 흥해읍 일월사당(日月祠堂) - 매년 10 월에 천지신명(해. 달)께 제사를 지내는데 구 영일군의 일월문화제가 개최되는 해에도 이곳에서 제를 올렸으며, 1995년부터는 통합포항시에서 통합포항시민의 발전과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일월신제를 올리고 있다

□ 영일군(迎日郡) - 1994 년 12 월 31일자로 폐지된 영일군의 명칭은 1914 년 일제에 의한 전국행정구역 통폐합시 흥해군(興海郡), 장기군(長기郡), 영일군(迎日郡), 청하군(淸河郡) 등 4 개군을 합하여 단일 군명을 정할 때 '삼국유사'에 나오는 연오랑.세오녀의 영일을 따 명칭을 정하였으며 당시 영일군 산하 18 개 면중에는 포항면이 포함 되었으며, 1949 년도에 포항읍은 포항시로 승격되었다가 1995 년1월 영일군과 통합하였다.

□ 도기야(都祈野) - 삼국유사에 의하면 일월에 제사지내던 지역이 도기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일제가 도기야라는 지명을 도구(都丘)로 변경시켰음. 현재 동해면 도구리에는 일월사당이 있음.

□ 일월동(日月洞) - 포항시 남구에 일월동이 있음.

□ 중명리(中明理) - 포항시 남구 延日邑에 소재하고 있는 洞으로 연오랑.세오녀 설화에 해와 달이 빛을 다시 찾았을 때 빛이 한가운데 비친 곳이라 하여 중명이라 했음.

□ 오천읍(烏川邑) - 옛 일월면과 고현면을 합하여 1914 년 오천면이라 했는데 오(烏) 는 까마귀, 즉 삼족오라 하여 발이 세 개 있는 까마귀는 민간설화에 해로 표현된다. 옛부터 이 지역을 영일 또는 오천이라 했음.

□ 세계리(世界理) - 잃었던 해와 달의 빛을 다시 찾기 위해 하늘에 제사를 지낸 제단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곳이며 해와 달이 빛을 찾았을 때 빛이 가장 먼저 비쳐 세계가 밝아졌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어릿불(魚龍불) - 원래는 어룡불이라 하였는데 변음되어 어릿불로 불리고 있다. 송도동 송도해수욕장에서 동해면 도구리(都丘理) 해수욕장까지 어릿불이라고 한다. 연오랑.세오녀설화에 두 부부가 바위 또는 고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왕과 왕비가 되었다는 설화내용에 고기를 용으로 표현하여 부부가 떠나간 불 이라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 장기읍성 - 포항시 남구 장기면 읍내리에 자리한 장기 읍성은 이 고장의 진산인 동악산에서 동쪽으로 뻗은 등성이에 있으며, 그 아래쪽으로는 장기천이 동해로 흘러 현내 들판을 형성하고 있다. 장기읍성은 삼국시대 이래 동해안을 지키는 중요한 군사기지였으나 일제 강점기때에 성안의 관아 등 시설이 파괴되고 단지 향교만이 복원되어 유지되고 있다. 옛 장기읍성 성문누각 옆에는 배일대라는 누각이 있었는데 현재는 초석만 남아있다. 이곳은 장기현감이 년초에 동해에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면서 국왕과 백성을 위한 기원을 하던 곳이다.

□ 칠포리 암각화 - 포항시 북구 흥해읍에 있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49호 영일 칠포리 암각화는 청동기 시대(BC 4~6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3개 구역에 5기가 분포되어 있다. 가면형의 그림이 바위의 정면에 새겨져 있고, 앞쪽에 조성된 평탄면은 제단이나 의식장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제작기법은 쪼아파기(Pecking)방법의 선각이며 畵形은 가운데가 좁고 상하가 벌어지는 실패모양의 도안으로 좌우호선을 4~5개의 횡선으로 연결하고 그 사이의 구간에 성혈을 새겼다. 각화의 도안의 기본형은 영주 가흥리 암각화와 닮았고, 고령 양전동 암각화나 천전리 암각화와도 유사한 점이 많다.

□ 기계면 고인돌 - 포항시 기계면 문성동등 주변 마을 앞 농로와 논밭 등에 위치한 고인돌들이 많다. 거대한 바윗돌을 굄돌 위에 세워 놓은 전형적인 남방식 계통의 고인돌이다.

□ 일월지 - 영일군 동해면 석동 해병부대 내에 있는 일월지

□ 냉수리 신라비와 고분 - 이 비석은 현존하는 신라 최고의 비석으로 중국 문서에서 발견되는 신라의 옛 국명인 사라(斯羅)가 최초로 나온다. 그리고 이 비에는 신라의 실성왕과 내물왕 두 왕이 진이마촌의 절거리에게 재산 취득을 인정하는 교를 내렸는데 계미는 9월 25일에 지증왕 등 각부의 대표 7명이 함께 논의하여 두 왕의 조치를 다시 한 번 확인한 다음 별교를 통해 절거리가 죽은 후에는 아우 아사노사신지는 재물 분배에 대해 문제를 일으키지 말 것이며, 만약 이를 어길 경우 중죄에 처할 것임을 결정하였고 이 명령은 중앙기관의 전사인 7명과 지방관서의 촌주 2명이 일을 마치고 이 사실을 기록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계미란 간지와 지증왕 등 각 칭호를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관련 기록과 연관지어 볼 때 지증왕 4년(503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 비는 국가에서 세운비로 당시 신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여러 문제를 다루고 있고, 왕명을 다룬 초기 율령체제와 형태를 보여주고 있는 현존 최고의 신라고비이다. 고르지 못한 네모꼴의 자연석 앞, 뒤, 위 3면에 글자를 새겼으며, 매 행별 글자수와 크기가 일정하지 않지만 대략 얖면은 12행 152자, 뒷면 7행 59자, 윗면 5행 20자로 총 231자가 새겨져 있다.

□ 냉수리 고분 - 냉수리 고분은 6세기 전반 신라시대 고분으로 한강이남에서 발굴조사된 횡혈식 석실고분으로는 최대 규모이다. 관장식, 금반지, 영락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지역 수장층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 흥해읍 일월사당(日月祠堂 ) - 매년 10 월에 천지신명(해. 달)께 제사를 지내는데 구 영일군의 일월문화제가 개최되는 해에도 이곳에서 제를 올렸으며, 1995년부터는 통합포항시에서 통합포항시민의 발전과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일월신제를 올리고 있다

□ 남미질부성(경상북도 지방기념물 제 96호) - 흥해읍 남쪽 평지 위에 돌출된 천연적인 구릉지를 이용하여 성벽을 축조하였다. 성벽은 흙을 이겨서 쌓은 토성이며, 성벽 둘레가 약 2km나 되는 대형급 성곽이다. 성안에는 남성리의 "못산(池山)마을"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 못산 마을의 서편 구릉지에는 성주의 무덤으로 전하는 고분이 7∼9기 정도 남아있다. 또 기록에는 1개의 못과 3개의 우물이 있어서 성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이용하였다고 하는데 현재는 1개의 못과 1개의 우물이남아있다.
이 성곽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 4권, 신라본기 4, 지증왕5년조에 나타나는데 여기에 의하면 9월에 사람들을 모아 파리성, 미실성, 진덕성 등 12성을 쌓았다고 하였다. 여기서의 "미실성"이 이성을 말하는 것으로 보여지며 이때 성곽 축조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있다. 그 이후의 기록으로는 동국여지승람 22권 흥해군 고적조에 고려 태조 13년 북미질부성주 훤달이 남미질부성주와 함께 항복하여 왔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적어도 고려초기에는 흥해군 일대를 다스리는 중심 성곽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성곽의 명칭이 "미질부성"으로 불리워졌고 축성연대도 서기 504년이었음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는 점은 성곽을 연구하는 학자나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대부분의 성곽들은 축성 당시의 이름을 알 수없어서 행정구역 또는 산이름에 따라 후대에 임의로 붙이는 경우가많으며 축성연대도 모르고 출토유물만으로 축성연대를 짐작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이 성곽은 흥해지역 뿐 아니라 포항지역에남아있는 성곽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축조된 성곽에 해당되며, 늦어도 고려시대까지는 흥해지역을 다스리던 행정의 중심지였다.

5. 설화의 분석  [TOP]

[ 설화 ]
『제8대 아달라왕 즉위 4년,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가 부부로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연오랑이 바다에 해조를 따러 나갔는데 갑자기 바위[巖/魚라고도 한다] 하나가 나타나 연오랑을 업고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이 보고서 말하기를 "이는 보통사람이 아니다"하고선 세워서 왕으로 삼았다[일본제기를 상고해보면 전후에 신라사람으로서 왕이 된 사람이 없다. 그러니 이는 변읍의 조그만 왕이지 참왕[眞王]은 아닐 것이다]. 세오녀는 남편이 오지 않는 것이 이상해서 가서 찾아보니 남편이 벗어놓은 신발이 있었다. 그녀 또한 바위 위에 올라갔더니 그 바위는 또 전처럼 세오녀를 업고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은 놀라 이상하게 여겨 왕에게 아뢰었다. 이리하여 부부가 서로 만나 그녀를 세워 귀비로 삼았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日]와 달[月]이 빛을 잃었다. 일자가 왕에 아뢰기를 "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나라에 내려있었는데 이제 일본으로 가버렸습니다. 고로 이런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왕이 사자를 보내 두 사람을 찾으니 연오랑은 말하기를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시킨 일인데 지금 어찌 돌아가겠는가. 그렇기는 하지만 나의 비(妃)가 짠 고운[細] 색비단[ ]이 있으니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지내면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색비단을 주니 사자가 와서 보고했다. 그 말대로 제사를 지냈다. 그런 뒤에 해와 달이 전과 같았다. 그 색비단을 나라의 보물로 하고 어고(御庫)에 간수하였다. 그 어고를 귀비고라 한다. 또 하늘에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한다』

[ 실사 ]
관련 실사를 찾아보면 아래와 같이 나온다.
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아달라기 4년(서기 157년) 2월조 「처음으로 감물현과 마산현을 두었다」
아달라기 20년조 「왜의 여왕 비미호가 사신을 보내와 방문했다」
'삼국지' 위지 왜인전 「其國本亦以男子爲王住七·八十年 倭國亂相攻伐歷年 乃共立女子爲王 名曰卑彌呼」
야마다[邪馬臺]의 여왕 비미호가 대외적으로 사신을 보내기는 신라가 처음으로서 서기 173년이다 위나라에 사신을 보낸 기록은 여러 번 있으나 신라에 파견한 것과는 시기적으로 차이가 많이 난다.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 사신파견 기록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위지 왜인전 「景初2년(서기 238년) 倭女王遣使 大夫難升米等諧郡...」. * 일본서기와 양서에는 3년으로 나온다.
위지 왜인전 「正始元年(서기 240년) 太守弓遵遣建中校尉梯雋...」
위지 왜인전 「正始4년(서기 243년) 倭王復遣使 大夫伊聲者掖邪拘等 八人上獻」
위지 왜인전 「正始6년(서기 245년) 詔賜 倭難升米黃幢」
위지 왜인전 「正始8년(서기 247년) 遣塞曺緣史」
북사 왜인전 「正始中(서기 240∼247년) 卑彌呼死」
위지 왜인전 「更立男王 國中不服 更相誅殺 當時殺千餘人...중략...復立卑彌呼宗女 壹與年十三爲王 國中遂定」

[ 실사적인 해석 ]
아달라왕의 시호
아달라왕 시호를 분석해보면 아(阿)는 '아침'의 준말로서 아침[朝], 새[新], 첫[初] 등 세 가지 의미가 있는데 그 중 新이고 달(達)은 '땅'을 뜻하는 우리말 이두표기고 라(羅)는 역시 나(那)와 같은 소국 또는 '나라'를 뜻하는 말이므로 결국 "아침땅의 나라"라는 뜻으로 신라라는 국명과 같은 것이다. 왕의 시호를 이두로 표기한 것이다. 초기에는 후대에 쓴 시호란 개념도 없었을 가능성이 많지만 그래도 이것은 고려인들이 지은 사서에 나오므로 이두식으로 표기하여도 시호인 것이다.
연오랑과 세오녀는 제철집단의 지도자
이 둘은 "제철집단의 지도자"였다. 고대에는 제철기술을 가진 집단이 우수한 무기와 농기제조 및 무역으로 세력을 잡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이들이 신라를 떠나 열도로 가버리자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고 표현한 것이다. 신라로서는 엄청난 타격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름도 제철을 상징
이들이 제철집단이라는 것은 이들의 이름에서도 확인된다. 영어로 대장장이를 'blacksmith'라고 한다. 왜 검다[black]는 말이 붙었을까? 그것은 고대에는 숯으로 야철(冶鐵)을 했기 때문에 이들은 대체로 옷이며 외모가 평소 일을 할 때는 검었던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현상이나 그것을 인식하는 것은 동서를 막론하고 동일한 것이다. 연오랑과 세오녀의 '까마귀 오(烏)'자는 흑(黑)이나 현(玄)과 바로 통하는 말이다. 烏는 곧 'black'이다. 현대에도 그렇게 쓴 예를 들면 컴퓨터가 보급되기 전에 공학에서 제도(製圖)할 때의 도구로서 먹물이 나오는 펜[pen] 같은 것을 오구(烏口)라고 했다. 또 연오랑의 '펼/늘일 연(延)'자는 단조 즉 두드려 펴는 것을 뜻하고 세오녀의 '가늘 세(細)'자는 가늘게 단조하는 정밀단조를 의미하기도 한다고 본다.
일월지정
일월이란 말은 음양의 개념으로 남녀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야철과도 관련이 있다. 日은 밝고 뜨겁고 도가니에서 벌겋게 녹은 쇳물을 은유하고 열간단조를 상징하기도 한다. 月은 빛이 차가우므로 냉간단조를 상징한다고 본다.
연오랑과 세오녀는 부부인가?
이들은 도왜시기가 다르고 각기 다른 집단의 지도자였고 부부가 아니다. 다만 설화구성상 부부로 표현했을 뿐이다. 설화 속에서도 이들이 부부였다면 왕비가 아닌 귀비로 삼을 수는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집단의 성격이 같고 선주지가 가까이 있다보니 설화로 꾸미면서 부부로 표현한 것이다.
비미호는 세오녀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 나오는 히미꼬[卑彌呼]는 여성지도자로서 신녀적인 성격이나 연대를 감안해 볼 때 세오녀로 비정된다.
「其國本亦以男子爲王住七·八十年 倭國亂相攻伐歷年 乃共立女子爲王 名曰卑彌呼」 > 「그 나라는 원래 남자가 왕이 되어 7, 80년을 살아왔으나 왜국에 난이 일어나 서로 치고 다투기를 몇 년 하다가 여자를 왕으로 공립하고 이름을 비미호라 했다」
「남왕 7, 80년」이 가야계 선견왕자와 묘견공주가 세운 야마다의 초기역사로 보이고 「相攻伐歷年」이 연오랑의 도왜시에 그 전에 있던 가야계와의 분쟁으로 판단되고 "여왕을 공립하였다"는 것이 유사 설화에서 세오녀의 도왜 및 세오녀가 연오랑의 귀비가 되었다는 내용과 대응되는 내용이다.
신라와의 관계
아달라왕 4년조에 설치한 감물현과 마산현은 이들이 떠나간 후에 신라가 그냥 병합한 것으로 보인다. 병합했다는 기록만 나오고 실사에도 설화에도 전투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16년 후에 비미호가 신라에 사신을 보내왔다는 것이 신라와의 관계가 나쁜 것이 아니었다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도왜시기
도왜시기는 설화대로 연오랑으로 대표되는 집단이 먼저 건너갔다. 그리고 위지 왜인전의 "歷年"에 해당하는 정도의 시차를 두고 세오녀집단이 건너갔다고 본다. 적어도 몇 년 간의 시차는 있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세오녀집단의 특징
세력이란 측면에서 볼 때 세오녀집단이 연오랑집단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고 본다. 그리고 이 집단은 전통적으로 여성지도자를 옹립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것은 아래와 같은 '북사'와 '삼국지' 위지 왜인전의 기사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북사 왜인전 「正始中(서기 240∼247년) 卑彌呼死」
위지 왜인전 「更立男王 國中不服 更相誅殺 當時殺千餘人...중략...復立卑彌呼宗女 壹與年十三爲王 國中遂定」 > 「남왕을 다시 세웠더니 나라 안이 복종하지 않아 서로 다시 주살하여 당시 천여 인을 죽였다...중략...나이 13세인 비미호의 宗女 일여를 다시 세워 왕으로 삼았더니 나라 안이 드디어 안정되었다」
晉의 起居注에 「晋武帝泰初2년(서기 266년) 倭女王遣重譯貢獻」
위지 왜인전의 분쟁기사는 명백히 비미호 사후다. 짐작컨대 비미호 사후에 그때까지 공립하던 여왕제를 폐지하고 남왕을 세웠던 것으로 보이고 그러자 위에서 보았듯이 여왕으로 공립되며 연정(聯政)을 하다가 비미호측과 남왕측과의 연정이 깨지고 내란 상태에 빠진 것으로 추정된다. 소국에서 천여 명이 죽을 정도면 큰 난리다. 그러다 비미호 가계의 신녀 지위를 물려받은 인물로 보이는 일여를 다시 여왕으로 세우자 내란이 그친 것이다. 나이도 13세라고 했으니 비미호도 처음 지도자가 된 것은 이 정도 나이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 후 서기 266년에도 대륙에 여왕이 계속 사신을 보내고 있다. 이것이 여성지도자의 전통인 것이다.
선주지
이들의 선주지는 역시 한쪽은 감물현이고 한쪽은 마산현이었을 것으로 본다. 사기 지리지를 보면 영일현의 고지명이 근오지현(斤烏支縣)이라고 나온다. 역시 '烏'자가 들어있다. 뜻으로 풀어보면 근(斤)은 '큰'의 이두고 지(支)는 고어로 시[支]로도 읽어 요즘의 사이시옷에 해당하는 말이다. 즉 "큰 까마귀의 현"이란 뜻이다. '烏'란 제철집단을 상징하므로 상당한 규모의 제철집단이 있었던 곳의 이름답다고 할 수 있다.
감물현의 甘勿도 이두표기로서 '烏'나 '현(玄)'과 같은 뜻이다. 천자문을 읽을 때 '하늘 천天', '따 地', '가물 玄', '누루 黃'이라고 할 때의 그 '가물'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검을'이라고 읽지만 옛날엔 '가물', '감물'이라고도 읽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ㄱ+아래아+ㅁ)을' 정도가 아니었나 짐작된다. 아래아가 '아'로 분화되고 '으'가 원순모음화현상에 의해 '우'로 변하면 연음법칙에 의해 자연스럽게 '가물'로 발음된다. 여기에 원래의 '(ㄱ+아래아+ㅁ)'발음을 살리려고 하면 미음이 추가되어 '감물'이 된다.
세오녀가 보내온 비단으로 제사지낸 영일이 세오녀의 선주지로 보이고 월성은 연오랑의 선주지로 판단된다. 그 근거는 석탈해집단이 신라에 와서 정착한 곳이 월성으로 기록되어 있고, 연오랑은 석탈해보다 약 1세기 뒤의 인물이며, 석탈해설화를 분석해보면 역시 제철집단으로서의 특징이 있으므로 연오랑은 석탈해가 데리고 온 제철집단의 후예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 집단은 지도자가 여성이 아닌 남성이기 때문이다.
일월의 개념을 음양으로 보면 이 선주지명의 경우는 음양이 바뀐 셈이다. 또 석탈해 설화를 분석해보니 원래는 진한인으로서 연나라의 용성국 출신으로 판단되고 연오랑의 '연'은 음이 같은 '燕'을 달리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연오랑이 석탈해의 후예라고 할 때 왜 신라에 있지 않고 이주를 했을까 하는 점은 역시 석탈해의 이주동기와 같지 않을까 판단된다. 선주지로부터의 독립과 신천지개척으로 본다.
①숯돌과 숯을 사용했다는 점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까마귀의 어원
까마귀도 옛날엔 음이 '가마기'였을 가능성이 많다. 새[鳥]에 붙이는 명사형어미는 대체로 '이'이고 기러기, 갈매기, 뻐꾸기 등과 같이 '가막'에 어미 '이'가 붙어 된 것으로 보인다. 또 오늘날의 표준말에서 '위'로 발음하는 것도 경상도사투리로는 '이'로 발음하는 특성이 있다. 예를 들면 '귀하다'를 '기하다'로 발음하는 경우다. 물론 요즘은 공교육에 의해 이렇게 발음하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 사전에 보면 까마귀의 고어가 '가마귀'로 나오고 흔히 까마귀와 까치를 합쳐서 부를 때 다시 축약현상이 발생하여 '까막까치'라고 부르는데 이 말이 어원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발음의 변화과정을 추정해보면 가막>가마기>가마귀>까마귀로 변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도해한 위치
이들이 도해한 위치는 그들의 선주지에서 바로 갔을 것으로 본다. 설화상 동해바닷가의 영일과 월성 앞바다에 그대로 해당되고 각각의 선주지에서 출발했다고 본다.
해조를 딴 의미
바닷가에서 해조를 땄다고 하는 것도 분위기상 사실은 질 좋은 사철(砂鐵)을 채취하고 선별하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들을 태워간 바위[巖]란?
바위[一巖/一云一魚]란 당연히 이들이 집단으로 떠나는 선단이다. 가야인들은 선단을 거북[龜]으로 나타내는데 이들은 바위라고 표현했다. 서기의 신대기에 보면 배를 천반선이라 하여 바위[磐]가 들어가기도 한다. 반(磐)이란 "넓적한 큰 바위"를 말한다. 원양항해가 가능한 대형선과 그것들로 이루어진 선단으로서 상당한 규모의 이주였다는 말이다. 바위라고 하면서 물고기[魚]라고도 하고 있는 것이 바로 배[船]를 암시해주는 것이다.
적극적인 이주
설화상 수동적으로 간 것으로 표현되어 있으나 사실은 세력이 커 가는 신라 옆에 붙어있는 것보다는 질 좋은 철산지를 찾아 신천지로 적극적으로 갔다고 본다. 신라에 철을 단순하게 공급만 해주는 위치보다는 신천지에서 세력을 크게 키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가기 전에 신라 옆에서 신라에 철을 공급하는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늘의 뜻
하늘의 뜻이라고 한 것은 현대인이나 고대인이나 인력으로 어찌 할 수 없는 결과를 두고 운명적이라고 한다든가 흔히 신탁이나 하늘에 돌리는 속성이 있다.
세오녀의 사신은 제철기술자
세오녀가 보내온 사신은 제철기술자였을 것으로 본다. 전투를 하고 쫓겨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중에 세력을 키우고 여왕에 공립된 후에 선주지에 있는 신라에 맨 먼저 사신을 보내고 화친을 하려고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당연히 이주 전에는 철도 거래를 했을 것이고 외교에 특별한 장애요인은 없었을 듯하다.
비단과 귀비고
비단은 제철기술을 은유한 것으로 본다. 제철기술이 부족하니 귀한 비단으로 은유된 것이다. 따라서 귀비고는 야철공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신라와 제철기술
신라가 저자세로 비미호 쪽에 요청했을 가능성도 있다. 신라는 사국 중에서 제철기술이 제일 뒤떨어졌고 조선(造船)에도 뒤졌기 때문에 해상으로 침입하는 자질구레한 집단에 늘 시달렸다. 신라가 국력신장이 상대적으로 뒤떨어진 원인이 바로 "제철기술부족과 바다로 진출하지 않은 폐쇄성"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박혁거세집단의 특성과도 그대로 일치한다. 대륙에서 반도로 이주해온 세력들 중에서 천마로 상징될 정도로 유일하게 육상으로 이동해온 집단이기 때문이다. 박혁거세집단은 원래는 중앙아시아의 순수한 유목민출신으로 보인다. 신라가 사국 중에서 제철기술이 가장 뒤졌다는 것은 신라의 또다른 설화에서도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①"수로부인설화" 참조
귀비고의 위치
하늘에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이라고 했는데 귀비고가 영일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보더라도 역시 이곳이 비미호집단의 선주지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도기야는 야철지
도기야라는 지명도 야철과 관련 있다. 이 역시 이두표기로 보이고 도가니가 설치된 땅이라는 뜻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도가니야>도기야 또는 야(野)를 열도어로 읽으면 노[野]가 되므로 도가니노>도기노로 변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기술자가 구주에 오래 있다가 왔고 당시 열도어는 가라어 즉 진한어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주지
이들이 도왜하여 정착한 곳이 어디인가는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일본의 기·기는 4세기 중반 이전의 열도역사는 전부 절사해 버렸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일본왕실의 시조신인 초고대왕과 가야 아라사등 이전의 기록은 없애버렸다. 그런데 가라의 선견왕자와 묘견공주가 먼저 도왜하여 구주의 팔대시를 중심지로 야마다[邪馬臺]라는 고대국가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으로 간 듯하고 '삼국지' 위지의 기록을 보면 원래 남왕이었는데 상공벌(相攻伐)했다는 것으로 봐서 야마다를 건설한 가라계와 세오녀보다 먼저 도왜한 연오랑측과의 전투로 보이고 그 후에 세오녀가 건너가서 여왕으로 공립되는 것으로 보아 구주로 바로 가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①춤추는 신녀 (이종기/동아일보사) 참조
다만 시마네[島根]현의 이즈모[出雲]는 신라와 가깝기도 하고 열도에서 제일 질 좋은 사철이 나므로 가능성이 없잖아 있지만 희박하다. 시마네의 이즈모[出雲]에 먼저 갔다면 그 얼마 후에 열도 제일의 사철산지인 이즈모[出雲]를 등지고 굳이 구주까지 가지 않았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고대의 여성지도자는 신녀
비미호가 무녀와 같은 성격을 띤 인물로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 기록되어 있으나 이것은 세오녀집단의 뛰어난 제철기술이 당시의 열도인들에게는 커다란 "문화충격과 기술충격"으로 비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세오녀집단이 전통적으로 여성지도자를 옹립한 것으로 보이므로 그 지도자는 자연스레 신관의 역할까지도 하는 "신녀적인 성격"을 띠면서 정치적인 파워와 결합하여 그런 이미지가 형성된 것으로 보이기는 한다.
세오녀와 비미호에 대한 이설
세오녀>신공설
세오녀를 두고 기·기상의 신공으로 비정하는 설이 있는데 터무니없는 비정이다. 신공은 가야왕족으로서 4세기 중반에 활약하다가 귀수태자가 천손으로 천강하여 구주를 정벌할 때 전사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신공의 실제모델은 아라가야의 왕 아라사등의 장녀로서 이름은 서기 신대기에 나오는 반장희 등 많은 이칭이 있는 인물이다. 전사시점은 신공섭정전기와 51년 3월조에 나오는데 서기 371년 3월 17일로 날짜까지 나오고 있다.
신공은 황후가 된 적이 없는 가공의 인물이다. 육하원칙 중 인물[who]이 틀리므로 이론의 여지가 전혀 없다. 따라서 2, 3세기에 등장하는 비미호는 신공과는 전혀 별개의 인물인 것이다. 기·기저자들이 연대를 120년 상대로 밀어 올려 마치 신공이 대륙기록에 나오는 비미호인 것처럼 인식시키려고 의도적으로 서기 신공기에다 위지에 나오는 비미호의 대위 사신파견 기록을 옮겨놓은 것이다.
비미호>묘견공주설
히미꼬를 두고 가야 김수로왕의 딸 묘견공주로 보는 설도 있으나 이 역시 아니라고 본다. 연대적[when]으로 차이가 너무 많이 난다. 김수로왕은 서기 48년에 결혼할 때 허왕후가 16세였고 20세부터 출산하여 50까지 낳았다 하더라도 자녀 열둘을 낳으면 서기 80년 전후로 막내를 출산했다고 봐야 하고 묘견공주나 선견왕자가 막내라 하더라도 비미호가 신라에 사신을 보내온 서기 173년 무렵이면 벌써 이들의 나이가 90세가 넘어 아무래도 무리다. 연대적으로 60년, 70년 이상의 차이가 난다. '삼국지' 위지의 기록에 「其國本亦男子爲王住七·八十年 倭國亂相攻伐歷年...」라고 나오는데 김수로왕을 보더라도 왕은 남동생이 맡고 묘견공주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신녀로서의 이미지로 야마다를 통치했을 것으로 본다.
집단의 성격으로 보면 1) 지도자의 신녀적인 성격, 2) 남자가 옆에서 보좌한 점, 3) 대규모 집단이주인 점 등 몇 가지 닮은 데가 있기는 있지만 연대가 차이가 많이 나면 같다고 보기 어렵다. 같이 보기 어려운 점을 들어보면 아래와 같다.
1) 신라에 사신을 보내올 정도인데 묘견공주가 비미호였다면 가야의 기록에 나타날 것인데 없다는 점
2) 여성지도자라도 '아마조네스'는 아니므로 남성이 반드시 옆에서 보좌를 하게 된다는 점
3) 위지 왜인전에 나타날 정도인데 구주 팔대시에 있는 묘견공주와 선견왕자의 유적에 비미호라는 호칭과 관련된 유적이나 유물이 전혀 없는 점
4) 묘견공주가 도왜한 가야는 유사에 의하면 김수로왕 건국초기만 해도 대륙의 발해만, 양자강중류의 무창지방까지도 무역을 했을 정도인데 지금의 경북 영일이나 월성까지 와서 도해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점
5) 설화에서 배를 바위[巖]로 비유했는데 가야인들은 선단을 거북[龜]으로 비유했다. 수로왕의 탄강신화나, 묘견공주의 구주상륙 설화 및 고사기 신무기에 아라가야왕 아라사등의 삼자 사오네쯔히꼬[槁根津日子]가 등장할 때도 거북을 타고 있다는 점도 가야계 설화가 아니라는 근거다. 거북을 탄 인물은 가야왕족을 의미하는 것이다. 가라는 해양왕국으로서 일본의 기.기나 신찬성씨록에서 서양의 포세이돈이나 넵튠 같은 해신으로서 등장하고 용으로 상징되고 용이 아닐 경우는 뱀과 거북으로 상징되곤 했다.
오히려 묘견공주와 선견왕자가 비미호보다는 두 세대 정도 앞선 세대로서 연오랑 집단에게 정복당했을 가능성이 많다고 볼 수 있고 또 동시에 세오녀는 구주로 가서 선대인 가야의 묘견공주의 종교적인 면에서의 신비적인 잔영의 덕분에 더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여성지도자로서의 둘의 원래의 이미지도 흡사한 면이 있다.
영일과 비미국
[다시 쓰는 한일고대사 (최진/대한교과서/1996년/44p)]에 보면 경주신라의 동쪽에 비미국(卑彌國)이 있었다는 설이 있는데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설이다. 세오녀가 열도로 이주하기 전의 선주지에서부터 비미국이 있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비미국이라는 소국이름을 보면 공간적으로는 두 개지만 시간적으로 선형으로 연결되고 지배층의 인적요소로 볼 때 같은 나라로 볼 수 있다. 비미국은 "비미호의 나라"라는 뜻이고 이 이름은 수직돌림자로서 계승되었을 개연성이 높기 때문이다.
야마다[邪馬臺]와의 관계
위지의 기록과 [춤추는 신녀 (이종기/동아일보사/1997년)]을 종합해볼 때 야마다[邪馬臺]라는 구주의 고대국가는 가라의 선견왕자와 묘견공주가 개척한 고대 가라의 분국으로 판단되고 그 후에 연오랑집단이 건너가서 야마다[邪馬臺]를 장악하고 있는데 다시 세오녀집단이 건너가서 세력을 잡은 것으로 보며 "세오녀가 연오랑의 귀비가 되었다"는 내용과 위지 왜인전에 70, 80년간 남왕이 통치하다가 그 후 서로 세력다툼을 하던 중에 "비미호가 여왕으로 공립되었다"는 내용과 대응된다. 이 점을 보면 세오녀집단이 제철기술에서 우위였든가 아니면 종교적인 면에서의 카리스마가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세력다툼을 하던 중이라는 얘기는 연오랑측과 가라분국세력 사이에 힘의 균형측면에서 서로 대등하던 양상에서 세오녀집단이 건너가서 반도에서 바로 이웃해 있던 연오랑세력에 가담함으로써 세력의 균형이 연오랑과 세오녀 측으로 기울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최종적인 승리는 당연히 연오랑과 세오녀측이다.
야마다국의 위치
'야마다'라는 열도의 고대소국은 구주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그 중심지는 위의 여러 가지 정황을 볼 때 [춤추는 신녀 (이종기/동아일보사/1997년)]에 잘 나와있다시피 가야의 김수로왕 아들·딸이 개척한 구주서부 팔대시 근방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야마다[邪馬臺]라는 나라는 가라왕자 선견과 공주 묘견이 1세기말 경에 세운 나라로 본다. 그리고 70, 80년간 가라세력으로 존속하다가 후에 연오랑과 세오녀 측에 정복되어 계승된 것으로 보이고 서기 266년 진(晉)에 사신을 파견한 기록 이후 3세기 중후반 경 대륙과 외교가 불가능한 소국으로 분열 해체되어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야마또[倭/大倭/和/大和/日本/大日本]의 어원
이 호칭은 고대 구주에 있었던 가라가 세운 야마다[邪馬臺]라는 이름에서 나온 것이고 음은 우리말 아래아의 특성에 따라 [야마(ㄷ+아래아)>야마다, 야마도]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을 후에 기·기를 지으면서 열도를 은유한 야마다[山田]로도 쓰고 야마또[倭/和/日本]로도 쓴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최초에 가라의 김수로왕의 딸·아들이 세운 구주의 고대국가 이름에서 파생된 국명이 후대에 역시 아라가라왕자인 천일창 즉 응신이 세운 열도 통일왕조의 이름인 야마또[倭/和]로도 쓰인 것이고 발음과 뜻을 유지하면서 다시 일본이란 국호로 변해간 것으로 보인다. 야마다[邪馬臺]의 '대(臺)'를 '일(壹)'의 오기라고 하는 설이 있는데 아니다. 복모음이 없는 열도발음으로 臺가 다[臺]로 발음된 것뿐이다
세오녀는 위지 왜인전의 비미호
70, 80년 간의 남왕통치기간 전반부가 선견왕자와 시기가 일치하고 그 후 세력다툼이 연오랑 도왜기시와 겹치는 것으로 보이고 비미호 여왕공립(女王共立)이 그 직후로 나타나므로 시기상으로나 인적 요소 측면을 봐도 무리 없이 맞아떨어진다.
기타사항
'삼국지' 위지 기록
위지에 나오는 비미호의 위나라 사신파견 기록상 서기 247년까지라면 비미호(=세오녀) 생전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여성지도자가 계속 비미호라는 이름으로 사신을 파견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고대엔 이름에 수직으로 돌림자를 쓴 경우가 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기·기상 가야왕족의 경우 모도(牟都)>모도[本], 마도[末通/薯童], 마다[末多/派/股/岐]라는 '(ㅁ+아래아)(ㄷ+아래아)'계열 수직돌림자를 쓴 예가 있다. 기·기를 저술하면서 이 이름들이 혈통을 나타내는 키워드로 쓰이고도 있지만 원래는 그들 집단의 실질적인 전통으로 판단된다.
연령을 추정해보면 이들이 도왜한 아달라왕 4년(서기 157년)에 비미호가 최소 10세 안팎으로 가정할 경우 사신을 보내온 서기 173년에는 20대 후반이고 '삼국지' 위지에 나오는 사신파견 기록 중에 늦은 기록의 연대 서기 247년을 고려하면 100세 안팎에 접어들어 전적으로 불가능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많아 보인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위지의 기록으로 짐작할 수 있다.
「남왕을 다시 세웠더니 나라 안이 복종하지 않아 서로 다시 주살하여 당시 천여 인을 죽였다...(중략)...나이 13세인 비미호의 종녀인 일여를 다시 세워 왕으로 삼았더니 나라 안이 드디어 안정되었다」 아마 비미호 사후에 그때까지 공립하던 여왕제를 폐지하고 남왕을 세웠던 것으로 보이고 그러자 비미호(=세오녀) 측과 남왕(=연오랑) 측과의 연정(聯政)이 깨지고 내란 상태에 빠진 것으로 추정된다. 소국에서 천여 명이 죽을 정도면 큰 난리다. 그러다 비미호 가계의 신녀 지위를 물려받은 인물로 보이는 일여를 다시 여왕으로 세우자 내란이 그친 것이다. 나이도 13세라고 했으니 비미호도 영일에 선주할 때 처음 지도자가 된 것은 이 정도 나이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만약에 세오녀가 '삼국지'에 나오는 비미호가 아니라면 비미호보다 한 세대 선대의 지도자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기·유사의 여인국은 야마다를 지칭
아달라왕 4년 경에 비미호의 나이는 적게 잡아도 10대 초중반 정도로 보인다. 위와 같은 내란기록 등을 보면 비미호 집단의 종교적인 성격의 단단함을 엿볼 수 있고 그 지도자의 카리스마가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집단의 운명을 걸 정도로 중시했다는 뜻으로 풀이되기 때문이다. 또 가라의 묘견공주와 영일출신 비미호가 다스리던 이러한 구주의 고대국가 야마다의 특성이 반영된 것이 바로 석탈해 설화에 나오는 여인국(女人國/女國/積女國)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라 본다. 아니라면 고대 반도 주변에서 여인국이라 불릴 만한 세력은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이 여인국의 위치는 '천하고금대총편람도'에도 구주에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일여의 대륙 외교기록은 진에 서기 266년 사신을 파견한 기록을 끝으로 단절되어 이 직후가 구주의 고대국가 야마다의 소멸시기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아라가야왕 아라사등이 열도개척에 나선 4세기 중반까지 약 80년 간은 열도에 나라다운 나라가 없던 역사공백의 시기다. 또 고대에 여성을 지도자로 옹립하던 전통이 이와 동시에 사라진 것으로 짐작된다.
위지에 등장하는 야마다의 사신 이름
위지에 서기 247년 여왕국 야마다가 위나라에 파견한 사신으로 재사오월(載斯烏越)이란 이름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고대엔 비사벌(比斯伐/빛벌/빗벌)에서 보다시피 시[斯]로도 읽고 주로 사이시옷으로 쓰인 점을 고려하면 원래 이름은 재오월(載烏越)이라 할 수 있고 가운데 '烏'자가 연오랑과 세오녀의 이름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보인다.
까마귀와 제철집단의 상관관계
위에서 제철집단의 평소의 일과 외모를 '烏'자로 은유했다고 했는데 이런 관점에서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오는 태양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진 금오(金烏/三足烏)와 월신의 상징으로 알려진 금와(金蛙)는 고구려나 부여의 건국신화 및 철기문화의 융성과 관련하여 제철기술을 가진 커다란 두 집단의 융합을 상징한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도 든다. 금오는 풍수에서도 태양을 상징하고 제왕을 상징하기도 한다. 본 설화에서 음양개념의 일월지정으로 놓고 본 시각과 고구려의 금오와 금와는 흡사해 보이기도 한다.
가야의 철기문화와 태양신 숭배사상은 고구려의 철기문화와 태양신 숭배사상과 이런 상징성 면에서 흡사하게 보인다. 또 "(ㄱ+아래아+ㅁ)을 오[烏]"에서 ((ㄱ+아래아+ㅁ)[烏]으로 보고 (ㄱ+아래아+ㅁ)[神]>감[神], 곰[熊]으로 분화되므로 감[烏]=감[神]으로 놓고 볼 때 고대 철기문화가 융성하던 시대에 고도제철기술을 가진 강력한 집단의 지도자를 감[神] 즉 감[烏]으로 상징하고 제왕을 은유한 것으로 판단된다.
일연도 서기의 실사를 알았다
그런데 일연도 유사를 지을 때 일본의 기·기를 보고 해독했었다는 근거가 바로 위의 일본제기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변읍의 왕이지 참왕[眞王]은 아닐 것이다」라는 것도 맞는 말이다. 당시에 구주에 있던 야마다[邪馬臺]라는 나라는 후세인의 기준으로 볼 때는 열도통일왕국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연선사가 일본의 기·기를 해독했다는 근거는 유사 탑상 금관국 파사석탑조에 가락국본기를 인용한 「...兼以鎭南倭...」라는 구절로도 알 수 있다. 이 구절은 최소한 1) 선견왕자와 묘견공주의 이주 또는 2) 아라가야왕자 천일창(=응신)의 열도통일 왜왕국의 수립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제기의 '帝'는 황제라는 뜻이므로 제기란 일본왕이 천황으로 나오는 서기와 고사기를 가리키며 기·기상의 내용을 언급한 것이고, 비미호 기록은 서기 신공기에 위지를 인용한 대위 사신파견기록 밖에 없고, 그것이 영일·월성출신 세오녀·연오랑의 기록이라는 것은 연대적인 면에서 볼 때 가장 부합하고, 이 설화에서도 구주에 있던 변읍의 왕이었다고 했으므로, 윗구절 「...兼以鎭南倭...」에서 말하는 왜란 바로 아라가야왕자 천일창(=응신)이 세운 대화왕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결론 ]
연오랑 세오녀 설화는 지금의 경북 영일과 월성 지역에 선주하던, 초기신라 건국세력과는 다른 집단으로서 바로 이웃에 있던 신라에 철을 공급해주다가 커 가는 신라에 철을 단순 공급만 해주던 위치에서 정치, 경제적으로 독자적인 길을 걷기 위해 신천지를 찾아 집단으로 이주하여 구주에 정착하게 된 제철집단 이주스토리의 실사를 절사하면서 그 대신 설화화한 것이다. 집단의 계보를 보면 신라건국세력도 아니고 가라세력도 아닌 제삼의 집단으로 판단된다. 이것도 결국은 고려인들이 반도에 있다가 반도 밖으로 나간 세력의 역사단절을 꾀한 사례 중의 하나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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