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계파
② 요약
③ 해방후 활동
④ 묘소
연일정씨홈페이지 www.yuniljung.com


①계파  [TOP]

延日(迎日,烏川)鄭씨 知奏事公派 33대손, 포은공파 23대손, 별좌공파 16대손

②요약  [TOP]

▣생몰 : 1923. 12. 22. ~ 1989. 2. 17.
▣직업 : 독립운동가





연일정씨 지주사공파의 장손이다. ‘고철(高哲)’이란 이명(異名)으로 더욱 유명한 항일 독립투사다. 부친은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 71번지에서 정의열과 경주 김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이 22세 되던 해, 태어나면서부터 나라 없는 설움을 당했던 그는 경성 제2고보(현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1944년 1월 20일,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일제에 의해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되어 중국 산동성 지난의 일본군 부대에서 복무하다가 천행으로 중국 산둥(山東)성 지난(濟南)의 황군 부대에서 동료 2명과 함께 탈출에 성공해 팔로군에 투항, 44년 3월부터 조선독립동맹 태항분원에 들어갔다. 이름도 고철(高哲)로 고친 후 조선의용군 등에서 항일 무력투쟁을 폈다.






1944년부터 1948년까지 <강제징병>, <태양기 아래의 사람들> 등 수많은 연극의 극본을 집필했다. 1948년 군 제대 후 민족 교육에 투신하여 길림 조선족 중학교 초대 교장이 되었다.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에서 잡지 <아리랑>의 편집위원으로 근무하다 ‘반우파투쟁’에 연루되어 노동개조형을 받았고,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연변인쇄공장에서 탄부로 일하며 20년 가까이 극심한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후 1979년 신원이 회복되어 연변대학교에 교수로 근무했다. 옌볜대학교 일본어과에서 석좌교수로 복권되었고, 83년 KBS 이산가족찾기 방송을 듣다 고국에서 노모가 애타게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85년에 아들인 현 종손(정래정,鄭來晶, 1957년 중국 길림성 연변생)을 데리고 영구 귀국했다. 실로 41년 만의 환국이었다.
꿈에 그리던 독립된 고국 땅에서 포은의 종손으로 산 것도 잠시. 4년 뒤 68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다.
어느날 선생이 아들인 정래정(鄭來晶, 1957년생) 씨를 불러 앉히더니 ‘樹高千丈 落葉歸根’ (수고천장 낙엽귀근, 아무리 큰 나무라 하더라도 결국 낙엽이 되어 거름이 된다) 이라는 중국 속담을 써서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때 정래정씨는 아버지께서 귀국을 결심하였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정래정씨는 부친의 영향을 받아 학문의 길을 걸었다. 옌볜대학교와 대학원에서 일문학을 전공해(옌볜대학교 일본어학부 1기생)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중국 대학입시에서 일본어 출제위원으로까지 참여했을 정도니 그의 위치를 짐작할 만하다.
귀국 후 정래정씨는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참여해 당시 추진했던 중국어 대사전의 집필과 교열에 참여했다.
지금 종손은 18년째 중국을 오가며 제조업과 무역업을 하는 기업인이다. 그럼에도 그의 고향 용인사무실에는 사해(辭海), 전당시(全唐詩), 사서삼경(四書三經) 등 동양 경전이나 고전들이 즐비하다. 뿐만 아니라 휘호와 그림 족자나 병풍, 집기들이 주인의 품격을 대변해주고 있다. 종손이 가장 아낀다는 글씨는 관즉득중(寬則得重)으로 ‘너그러우면 여러 사람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다. 필자는 그 휘호를 보면서 종손으로서 지녀야할 품성 역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부친의 중국에서의 이력을 말할 때 종손의 눈은 빛났고 말투는 웅변조로 바뀌었다.
“작년 9월에 제가 황산에 다녀오면서 상해 임시정부에 들렀습니다. 선친께서 항일 독립운동을 한 형적이 남아 있더군요. 정말로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모금함에 인민폐로 300원 넣고 왔죠.”
“선친께서 연안에 들어가니 무정 장군, 주덕 총사령관, 모택동 주석 등 12명의 원수급 지도자가 있었다고 해요. 무정 장군은 조선의용군을 이끈 분이셨지요. 선친께서는 빼앗긴 조국에 계실 때는 태극기라고는 보지 못했는데, 중국 연안 동굴에서 처음으로 태극기를 보았다고 해요. 일본군에서 탈출해서 찾아온 조선의 젊은 엘리트를 환영하기 위해 그들이 태극기를 게양하고 애국가를 연주해주었으니, 당시에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선친은 그 감격을 잊지 못하고 독립운동에 매진했고 길림성 동부지역군구의 사단장을 지냈을 정도로 뚜렷한 업적을 남기셨어요.”
“광복된 조국 땅을 밟아보지도 못한 채 한 많은 만주 생활을 하시다 6·25 동족상잔이 일어났어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만약 무정 장군이 북한으로 들어가지 않고 중국에서 지도자로 승승장구했더라면 남북 간에 완충 역할을 해서 그 참혹한 전쟁을 막는데 크게 기여하지 않았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가 포은 선생의 종손이라는 사실을 언제쯤 알았는지 물어보았다.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비로소 포은 선생의 후손임을 알았어요. 위로는 누님이 두 분 계셨는데, 제가 태어난 것을 좋아했어요. 나중에 귀국해서 처음 뵌 할머니께서는 저를 더욱 귀하게 여겨서 ‘중공 손자’라고 하면서 아꼈죠. 아마 종가를 지킬 종손이 될 사람이라서 더욱 그랬을 겁니다.”
귀국 후 종손은 종사를 챙기면서 6년 동안 종토를 찾아봤다. 그때 호적등본을 떼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한다.
“창씨개명인데요, 다른 집도 아니고 충절의 상징인 우리 집에서 남도 아닌 종손이 창씨개명을 해야 하는 사정이었어요. 그런데 선친의 성함이 ‘오천철수(烏川哲洙)’라고 되어 있었어요.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할아버지는 ‘나라가 망해 창씨개명을 하더라도 충신 집안에서 순순히 따를 수 없다’고 생각해서 편법을 쓴 것이죠. 오천은 얼핏 보면 일본식 이름인 것 같지만 실은 예전의 관례로 관향을 앞에 쓰고 뒤에는 그대로 본 이름을 표기했을 뿐이었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대처라고 생각합니다. 저들을 속인 것이지요.”
사업의 성취는 어땠느냐는 질문에는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다.
“저는 돈도 벌어보았고 또 거액을 날리기도 했어요.”
이어 그간의 역정을 담담하게 소개했다. 현재 중국에 유망한 제조업체를 가지고 있으며, 강원도의 소나무가 너무 아름다워 국립공원 경내에 몇 만평의 땅을 사두었고, 종택을 재건하기 위해 고향 땅에 2천 평의 대지를 마련했으며, 목재도 장만했다고 한다.
“나무가 4년째 마르고 있어요.” 자신이 그토록 꿈꿔온 종택 재건에 착수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읽힌다.
끝으로 종손은 극적인 얘기기 하나를 보탰다. “제가 딸만 두었었는데, 작년 9월 아들 하나를 얻었습니다. 이름은 정조훈(鄭朝薰)이라고 지었어요.” 포은 종가의 종통이 이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③해방후 활동  [TOP]



아버지께서는 1945년 8.15 해방이 되었지만 타의에 의해 귀국하지 못하시고 중국에 머물러야 하셨기 때문에 군 생활을 접고 그곳에서 조선인들을 위한 교육사업에 매진하셨습니다. 중국 길림吉林시에서 조선중학교를 직접 설립하고 초대교장으로 취임하는 등 교육사업에 정열을 쏟으며 보내셨습니다. 저희 어머니와는 그때 만나 결혼하셨구요. 글쓰기에도 소질이 있으셔서 의용군 시절에는 희곡 ‘조선은 살았다’‘개똥이와 예쁜이’ , ‘풍자극 이발소’ , 등을 발표하셨고, 신문사에도 근무하시다가 1958년 4월에는 중국작가협회연변분회 편집부장으로 재직하여 ‘아리랑’, 단막극 ‘일일상사’ 등을 발표하셨습니다. 그리고 김무정 장군등과 함께 조선의용군을 창설, 활동하셨는데 당시 동료들 일부는 북한으로 가시고 6.25에 참전한 분 들도 많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님께 왜? 동료들과 함께 하지 않으셨느냐고 여쭈었습니다.
그 질문에 아버님은 “내 고향은 남쪽이다. 이랬던 저랬던 동족간의 전쟁인데, 여기에 참가하는 게 포은가문의 종손으로 말이 되느냐?”며 역정을 내셨습니다. 연변에서 사시며 자주 어울리시던 분들도 대부분 독립운동을 하셨던 작가 분들이셨는데, ‘마지막 분대장’이란 글로 유명하신 소설가 김학철 선생과 소설가 김용식 선생, 항일운동을 함께 하신 최명세 선생 등과 교류하며 민족의식과 교육에 대해 종종 토론하시곤 하셨습니다.
<참조 : 종보 제30호>
④묘소  [T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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