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파 [TOP]
▣연일정(延日鄭)씨 지주사공파 10대손, 문충공(포은공)파 시조
▣족보스캔
◐영정 [TOP]
지정번호 : 향토유적 제13호
지정년월일 : 1990.11.22
시대 : 고려 공양왕 2년(1390)
소재지 :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 충렬서원 영당
소유자 : 연일정씨 포은공파 종중
규모 : 견본설채(絹本設彩)
화폭 236×111cm
정몽주(鄭夢周)의 초상은 모현면 능원리 충렬서원(忠烈書院)과 영당(影堂)에 각각 봉안되어 있다. 『포은문집(圃隱文集)』「화상편(畵像編)」에 의하면 선생의 초상화는 고려 공양왕 2년(1390), 좌명공신(佐命功臣)에 녹봉되어 입각봉안(立閣奉安) 된 때의 공신도상(功臣圖像)이라고 한다.
조선 명종 10년(1555)에는 가묘의 영당에 인각(麟閣)된 초상 1본을 이모(移摸)하여 영천(永川)의 임고서원(林皐書院)에 봉안했으며, 선조 8년(1575)에도 가묘본을 이모하여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에 봉안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선생의 초상은 3본이 전하고 있었으나, 임진왜란 중 소실되어 임고서원본만 남았다. 그후 광해군 11년(1619)에 박경신(朴慶新) 이 화사(畵師) 권응(權應)에게 임고서 원본 하나를 이모케하고, 이듬해 봉사 손(奉祀孫) 준(儁)이 가묘에 봉안했다.
임진왜란 이전 본으로 유일하게 전하던 임고서원본 역시 훼손되자 인조 7년(1629) 화사 김육(金堉)에게 이모토록 하여 신본을 봉안하고, 구본(舊本)은 궤(櫃)에 넣어 보관하다가 효종 5년(1654), 후손 간(侃)이 충렬서원으로 이봉(移奉)하였다. 그후 숙종 3년(1677) 화사 한시각(韓時覺) 으로 하여금 다시 가묘본 3본을 이모케 하여 가묘의 영당·충렬서원·숭양서원에 각기 봉안했다.
한시각이 전사(傳寫)한 이모본도 얼마 안가서 멸실되었으므로 다시 이모를 착수하였는데, 충렬서원에서는 영조 27년 화사 장경주(張景周)가, 숭양서원 에서는 영조 44년 화사 한종유(韓宗裕)에 의하여, 이듬해 영조 45년에는 가묘에서 한종유로 하여금 전사케 하여 각기 봉안했다.
「가정고본(嘉靖皐本)」 즉, 명종 10년 을묘본(乙卯本)은 고종(高宗) 신미년(辛未年;1906)에 철향(撤享) 후 가묘에 궤장(櫃藏)하여 전하고 있다. 충렬서원 영당에 소장된 초상은 전신교 의좌상(全身交椅坐像)으로 고려말엽의 복제(服制)인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청포단령(靑袍團領)을 입은 좌안팔분상(左顔八分像)이다. 양손을 소매 속에서 맞잡은 위로 금박(金箔)의 각대(角帶)가 있고, 단령(團領)사이로 첩의(帖衣)가 나타나고 있다. 비록 중모본(重摸本)이기는 하나, 고려말엽의 화격(畵格)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요약 [TOP]
포은 정몽주(鄭夢周:1337∼1392)는 고려 말의 충신으로 본관은 연일이고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지주사공파 습명(襲明)의 11세손으로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조종(祖宗)이며 반만년 한국사를 대표하는 충신(忠臣)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고려사]에는 그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있다.
"정몽주가 예조정랑 겸 성균관 박사로 있을 때 경서 중에서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은 오직 [주자집주]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가 강설한 내용은 사람들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어서 듣는 이의 의심을 깨뜨려 주었다. 나중에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이 들어왔을 때 뜻이 완전히 부합하므로 유자들이 다시 한 번 탄복하였다. 이색은 자주 그를 칭찬하여 말하기를 '정몽주의 이론은 어떠한 문제로 논란을 벌여도 이치에 들어맞지 않음이 없으니 동방 성리학의 시조로 삼을만하다'고 하였다"
민자복이 어느날 정몽주를 찾아갔을 때 정몽주가 "詞章은 末藝이고 이른바 身心의 학문이 있는데, 그 말은 '대학'과 '중용'두 책에 갖추어져 있다."고 한 말을 정도전에게 전했다. 당시 16~7세였던 정도전은 이 말을 듣고 두 책을 구해 읽었는데 "비록 잘 알지는 못하지만 매우 기뻤다."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정도전은 정몽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몽주는 '대학'의 提綱과 '중용'의 會極에서 도를 밝히고 도를 전하는 뜻을 얻었다. '논어', '맹자'의 精微에서 操存, 涵養하는 요령과, 체험하고 확충하는 방법을 얻었다. '주역'에서는 先天, 後天이 각각 體, 用이 된다는 것을 알았고, '서경'에서는 精一執中이 제왕이 전수한 심법임을 알았다. 그리고 '시경'은 민이(民彛)와 物則의 교훈이 근본이 되고, '춘추'는 도의(道誼), 功利의 구별을 분변한 것임을 알았으니.. 우리 동방 오백년에 이 이치를 안 자가 과연 몇사람이나 되겠는가? [三峰集, '포은奉使藁序]
조선시대의 주자학자들인 기대승, 김장생, 송시열, 등은 한국 유학의 원류을 밝히면서 한결같이 그를 비조로 꼽았다. 그러나 보다 더 주목할 만한 것은 외교적인 면에서 그가 이룩한 업적이다. 고려 말에는 중국의 명조와 일본 등과의 외교관계가 더욱 복잡다단해졌다. 고려의 조정에서는 그를 여러 차례 외교사절로 파견하여 이들 나라와 교섭을 벌였던 바, 그는 명과 일본 두 나라를 드나들며 이들 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데 외교수완을 발휘하였다. 그 수완이 워낙 뛰어나 국내외의 정계에서 그를 우러러볼 정도 였으며, 고려 말기 국지의 정치활동가로서 자타가 공인할 정도가 되었다.
포은 몽주(夢周)는 1337년(충숙왕 복위 6년)에 경북 영천에서 일성부원군 정운관(鄭云瓘)과 후일 선생에게 “가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라는 유명한 시조로 아들을 훈계했던 현철한 어머니 영천이씨 사이에서 아들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이씨(李氏)가 아름다운 난초화분을 안고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화분을 깨뜨리는 꿈을 꾸고 사흘 후에 낳았다고 하여 처음 이름을 몽란(夢蘭)이라 했다가, 몽란이 아홉살 되던 해 그의 어머니가 대낮에 물레질을 하다가 고단하여 깜빡 잠이들어 꿈을 꾸었는데, 금빛나는 한 마리의 용이 뜰의 배나무 위에서 배를 따 먹으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서 깨어나 나무를 쳐다보니 몽란이 배나무 위에서 용처럼 웃고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 그의 어머니는 몽(夢)자에다 용(龍)자를 붙여 몽룡(夢龍)이라고 고쳐 불렀다. 몽룡이 18세 되던 어느 날 새벽 그의 아버지 운관(云瓘)의 꿈에 중국 고대에 자기 형 무왕(武王)을 도와 은(殷)나라를 멸하고 주(周)나라를 세웠던 주공(周公)이 나타나 "몽룡은 후세에까지 가문과 명성을 길이 빛내게 할 것이니 소중히 키워라" 하고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관례(冠禮)를 치르면서 주공(周公)의 주(周)자를 따서 이름을 몽주(夢周)로 고쳤다. 몽주는 자라면서 충(忠)과 효(孝)와 의(義)가 남달리 뛰어났다. 그가 20세가 되던 해 아버지를 여의고 3일 동안이나 물 한모금 마시지 않고 통곡하였으며 당시의 풍습이 부모의 상복을 겨우 백일밖에 입지 않았는데도 묘소 옆에다 여막을 짓고 산중에서 혼자 3년 동안이나 상식을 올리며 효(孝)를 다하자 세상사람들은 하늘이 내린 효자라고 칭찬했고 공민왕도 그의 집에 정표(旌表)를 세워 표창했다고 한다.
1360년 24세에 연달아 삼장에 장원으로 급제했던 몽주는 이듬해에 예문관 검열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라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순충윤도동덕좌공신으로 벽상삼한삼중대광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올라 익양군 충의백에 이르렀고, 일찍이 신진사류의 한 사람으로 고려의 국운을 회복하기 위하여 진충갈력(盡忠竭力)하면서 보수주의자들과 결별하여 배원친명(排元親明 : 원나라를 배척하고 명나라와 친함)의 노선을 따름으로써 이성계(李成桂) 등과 손을 잡고 국제 정세에 순응하여 고려의 나아갈 길을 열고자 했다. 선생은 배원친명책(排元親明策)을 취하면서도 이성계 등의 급진정책을 견제하면서 중용을 택했다. 그리하여 공민왕21년(1372)에는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가서 높은 식견과 고결한 인품으로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을 감동시켜 여명(麗明)관계의 우호적인 길을 트고 돌아왔다. 이 때의 교통로는 북쪽의 원나라를 의식하여 뱃길로 다녔는데 돌라오는 길에 폭풍을 만나 고려사람 11명이 모두 죽고 선생만 겨우 13일만에 구조되었고, 사경을 넘는 그 어려움 속에서도 국교문서만은 온전히 보존하여 돌라왔다고 한다.
그 후로 명나라에 여러 차레 드나들면서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마다 이를 적절히 해결했으면서도 친원파에 몰리어 언양에서 1년 여의 유배생활을 했다. 일본과의 왜구문제가 실 타래처럼 꼬이자 이를 풀기 위하여 선생은 풀려났고, 돌아온 선생은 쉴 사이도 없이 다시 미개하여 표독하기만 하던 왜인들을 선생의 고결한 인품과 원숙한 외교수완으로 설복시켜 기왕에 그들이 납치해 갔던 고려인 포로 700여명을 그들이 제공하는 열 척의 배에 싣고 돌아 옴으로써 조정은 물론, 그 가족들로부터 어버이처럼 우러름을 받기도 했다.
선생과 이성계와의 인연은 일찍이 공민왕12년(1363)에 이성계가 여진족을 토벌할 때 종사관(從事官)으로 출전하여 여러 계책으로 그를 도와 승리케 한데서 비롯 되었고, 그 후 우왕 3년(1377)에도 지리산 왜구 소탕전에 함께 참가하여 지략을 제공함으로써 큰 공을 세우게 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선생은 자기보다 두 살 위인 백전백승의 젊은 장수 이성계와 정의가 두터웠고, 고려의 중흥을 위해서는 쓰러져가는 원나라를 버리고 명나라를 가까이 해야 한다는데 뜻을 같이 했다.
우왕 14년(1388)에 조정이 정명군(征明軍)을 출진시키려하자 그 동안 애써 명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어온 선생은 이를 반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그 후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 일파가 우왕과 최영장군을 제거하려 할 때도 극구 만류하였으나 역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드디어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세우면서 이성계가 문하시중(門下侍中: 수상)이 되고 선생은 그들의 요청에 못 이겨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부수상)이 되었으나 그들의 속셈을 간파한 선생은 자기의 소신을 펼 수 있는 기회를 포착코자 했다. 그러던 어느날 이성계가 해주에 나갔다가 말에서 떨어져 큰 부상을 입고 촌가에서 치료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선생은 이 기회에 정도전, 남은, 조준 등을 탄핵하여 귀양 보내고 이성계를 제거하려 했다. 이 기미를 알아챈 이성계의 아들 방원이 급히 자기 아버지를 개성으로 오게 하여 선생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이때부터 방원은 정뭉주를 제거하려 했으나 워낙 조야에 신망이 두터운 선생을 제거할 구실이 없을 뿐 아니라 그의 아버지가 그것을 원치 않았다.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조준(趙浚) 등을 중심으로 한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혁명 모의(革命謀議)가 한창 무르익던 어느 날 밤 몽주는 이성계의 동향을 파악하고자 문병을 구실로 그를 방문하였는데 이방원(李芳遠 : 이성계의 아들, 후에 태종이 됨)은 술자리를 마련하고 몽주의 심중을 떠보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시(詩) 한 수(首)를 읊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如此赤何如 如彼赤何如)
서낭당 뒷담이 무너진들 또 어떠리(城隍堂後垣 頹 赤何如 : 혹은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또 어떠리)
우리도 이같이 하여 안 죽으면 또 어떠리(我輩苦此爲 不死赤何如)
이 시조가 널이 알려진 하여가(何如歌)이다.
[청구영언에서]
몽주는 이 시(詩)가 자기의 마음을 떠보는 것임을 알아차리고 술잔을 보내며 화답하였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야 있고 없고(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也歟)
이것이 유명한 단심가(丹心歌)이다.
[청구영언에서]
몽주의 굳은 마음을 움직일 수 없음을 안 방원(芳遠)은 그를 제거할 수밖에 없다고 결심하고 심복 부하인 조영규(趙英珪)를 시켜 군기고(軍器庫)에서 쇠뭉치를 꺼내어 선지교(選地橋) 밑에 숨어 있다가 몽주가 지나갈 때 치라고 하였다. 몽주는 이 모의 사실을 변중량(卞中良)을 통하여 미리 알고 있었지만 피하지 않고 각오한지 오래된 죽음을 조용히 기다렸다. 살해되던 날 아침 조상들의 신위에 절하고 부인과 두 아들에게 이르기를 "충효를 숭상하는 가문이니 조금도 낙심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한사코 말려도 뒤를 따르는 녹사(錄事) 김경조(金慶祚)를 데리고 돌아오는 도중에 친구 성여완(成汝完) 집에 들러 술을 마신 후 다시 말을 타면서 수행하는 녹사 김경조에게 말하기를 "너는 뒤에 떨어지거라"고 하자, 녹사는 "소인은 대감을 따르겠습니다. 어찌 다른 데로 가겠습니까."하였다. 몽주는 말을 거꾸로 타고 김경조에게 말을 끌라 하면서 "부모에게 물려받은 몸이라 맑은 정신으로 죽을 수 없어 술을 마셨고, 흉한이 앞에서 흉기로 때리는 것이 끔찍하여 말을 돌려 탄 것이다"하며 선지교로 향하였다. 다리를 건너려는 순간 조영규를 비롯한 4∼5명의 괴한이 나타나 쇠뭉치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앞에서 가던 김경조가 먼저 쓰러지고 이어 몽주가 피를 흘리며 말에서 떨어져 숨을 거두었다. 이때 몽주의 나이는 56세였으며 선혈을 흘린 선지교 돌 틈에서 대나무가 솟아나 그의 충절을 나타냈다고 하여 선지교를〈선죽교(善竹橋)〉라 부르게 되었다. 몽주의 시체는 죄과(罪過)로 몰았기 때문에 내버려두었으나 송악산(松嶽山) 중들이 염습(殮襲)하여 풍덕(豊德) 땅에 묻었다. 선생을 제거한 이성계 일파는 거리낌 없이 자기들의 계획을 일사천리로 진행하여 그 해 7월에 자기들이 세운 공양왕마저 제거하고 이성계가 등극하기에 이르렀다. 통일 신라(統一新羅)에 이어 34대왕(大王)을 거치면서 475년간 지속되었던 고려 왕조(高麗王朝)는 정몽주의 죽음과 함께 몰락하고 말았지만 기울어져가는 고려왕조와 새 왕조 창업을 꿈꾸던 이성계의 신흥 세력이 불붙던 절박한 상황 속에서 살신성인(殺身成仁)으로 의(義)를 살렸던 몽주의 충정과 일편단심은 우리 민족과 더불어 역사의 터전에서 영원토록 기억될 것이다. 조선(朝鮮)이 개국되고 고려의 역사와 인물들이 터무니없이 왜곡되었어도 태종(太宗)은 권 근(權 近)의 상소를 받아들여 몽주의 묘(墓)를 고향인 영천(永川)으로 이장할 것을 허락하였고, 몽주의 관작을 복구시켜 영의정(領議政)에 추증하고 회유책으로 자손들에게 토지와 벼슬을 내려 주었다.최영장군, 이성계와 더불어 고려삼걸(高麗三傑)로 불려지기도 하고, 목은 이색(牧隱 李穡), 야은 길재(冶隱 吉再)와 더불어 고려삼은(高麗三隱)으로 추앙 받기도 한다.
몽주의 묘(墓)를 이장할 때 면례(緬禮) 행렬이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水枝面)에 이르자 앞세웠던 명정(命旌)이 바람에 날려 지금의 묘자리에 떨어졌으므로 이곳에다 안장하였다고 한다.
매년 포은의 출생지인 경북 영천과 묘소가 있는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에서 학술대회 및 백일장, 민속공연, 추모제례 등 포은 문화축제가 열리고 있다.
◐선죽교에 뿌려진 피 [TOP]
1376년 정몽주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 언양에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나왔다. 사신으로 규우슈우의 지방장관에게 가서 왜구의 단속을 청하여 응낙을 얻어냈을 뿐 아니라 왜구에서 잡혀간 고려백성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1380년 이성계의 휘하에서 외구토벌에 참전하였고 명나라에서 가서는 세공(歲貢)의 삭감과 함께 5년간 미납한 세공을 면제받아 국의를 회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고려의 부패는 극도에 이르러 대세는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공양왕4년 왕세자 석(奭)이 명나라를 다녀온다는 소식을 들은 수문하시중 이성계는 국가의 원훈으로서 황주에까지 마중을 나갔다. 다음날이면 왕세자 일행과 황주에서 서로 마주치는 날이니, 하루의 시간적 공백이 있었다. 이성계 일파는 실로 오랜만에 사냥으로써 장부의 호연지기를 풀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리고 예로부터 범이 많기로 유명한 봉산은 인적이 닿지 않는 곳으로서 숲이 우거질 대로 우거져 그야말로 원시림을 이루고 있었다. 백발백중 명궁 중의 명궁 이성계의 활시위소리에 다라 꿩과 노루 등이 허공에 솟구쳤다가 힘없이 아래로 떨어진다. 그러나 이성계는 말이 이리저리 달리는 순간 쓰러진 고목나무에 말발굽이 걸려 바위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얼굴과 팔뚝은 보기에도 흉하리만큼 벗겨져 유혈이 낭자하였고, 몸은 전혀 움직이지를 못했다. 허리를 단단히 다친 모양이었다. 부하들이 급히 모여들어 지혈을 하는 한편, 황주로 옮겨 치료를 받도록 하였다.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낙마하였다는 소문은 곧바로 송도에 퍼졌다.
"이시중도 별 수 없이 늙었군. 전 같으면 그런 일이 없었을 텐데." 하며 이성계의 용태를 주의 깊게 지켜보려는 눈치들이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이성계 일파의 걱정은 태산같았다. 이 칼날처럼 위태로운 처지에서 호연지기를 풀기 위한 하루의 사냥이 큰 화근이 될 줄이야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이지란, 남은 정도전 등이 혼수상태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이성계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겨우 신음소리만 낼뿐, 생사조차 예측할 수 없을 만큼 중태였다.
이 무렵 아홉 공신의 한 사람으로 친명파의 거두이자 대학자로서 덕망이 일세를 풍미한 정몽주는 오랜 전부터 권신들이 발호하여 권세를 휘두르는 것에 대해 비위가 상해 있었다. 우와 때부터 권세를 잡았던 이인임, 최영 등이 없어지자 이성계 일파가 득세하여 정권을 농락하기에 이르렀으니 악순환이 끊이지 않고 있는 셈이었다. 더구나 정도전처럼 학문의 길을 닦았던 사람마저 이성계에게 동조하여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있는 데 대해 정몽주는 못마땅해 했다. 그리하여 그는 아주 이 기회에 이성계 일파는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방원이 이성계를 그날 밤중 개성으로 돌아오게 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성계가 낙마하여 병환 중에 있다 하니, 문병을 아니 갈 수도 없었다. 정세를 살피기도 할 겸 정몽주는 그의 사저로 가기로 하였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성계의 아들 방원은 조영규를 데리고 아비 옆을 떠나지 않고 지켰다. 조영구가 이성계더러 들으라고 한 마디 하였다.
"정몽주 대감의 병 문안은 곁으로의 명분일 뿐 그 속셈은 다른 데에 있을 것입니다. 조심하여야 하옵니다."
"당치않은소리, 정대감과 나는 오랜 친구 사이인데 그럴 가 있나?"
그러자 방원이 답답하다는 듯, 침상에 손을 짚으면서 말했다.
"아닙다. 아버님!"
마침내 정몽주가 문병을 마치고 방원과 대좌하게 되었다. 먼저 방원이 말문을 열었다.
"포은선생, 술이나 한잔 드시며 여러 가지 종은 말씀이나 해주시오."
"내가 무슨 대학자라고 좋은 말이 있겠소?"
"대감께서는 당대의 대학자 이신데 성리학에 대해 좋은 말씀을 좀 해주시오."
"성리학이라면 심신의 수양이 으뜸이지요."
학문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일 뿐, 화제는 바뀌어 고려조의 정치이야기가 나왔다. 이방원은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정몽주의 속마음을 떠보기 위하여 시조 한 수를 유려하게 뽑아 내려갔다.
저 후세에 널리 알려진 '하여가' 였다. 다썩어져 가는 고려 왕실 만 붙들기 위해 고집을 부리지 말고, 칡덩굴처럼 얽혀서 사이좋게 사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는 내용이다. 정몽주는 노래를 다 듣고 나서 좋은 시라고 칭찬한 다음, "젊은 사람의 노래만 듣고 그대로 있을 수야 없지, 화답하는 것이 내 인사이니 내 노래도 들어보게" 하였다.
이몸이 죽고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줄이 있으랴.
만고의 충절 포은은 '단심가'를 통하여 고려조에 대한 충성을 거듭 피력한 것이다. 방원에게는 시조가 아니라 자기를 나무라는 호령처럼 들렸다. 이로써 두 사람은 서로의 뜻을 알고 헤어졌다.
이방원과 헤어진 정몽주는 돌아오는 길에 전부터 자주 드나들던 술집에 들었다. 초여름의 싱그러운 신록이 송도를 곱게 물들이는 가운데, 숲 사이에서는 이름 모를 새들이 노래하고 있었다
"대감마님, 오랜만에 오십니다. 오늘은 마침 좋은 생선을 지져 놓았으니 많이 잡수시고 가시지요."
"고맙네, 한잔먹고 가야겠네."
그리고는 주막 마루에 걸터 앉았다. 눈앞에는 얕은 울타리에 꽃이 만발하여 나비가 날아들고 있었다. 낯선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수근거리고 잇는 것이 눈에 띄었다.
"주모, 술을 가져오게."
한참 후에야 술상이 나왔다. 뿌연 막걸리에 생선 지짐이가 구미를 돋구었다. 대작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연거푸 석 잔을 마신 후, 지는 해를 바라보며 혼자 울고 있었다. 도시 일어서려는 기색이 없자 보기에 딱했든지 녹사가 곁으로 다가섰다.
"대감, 해가 선산에 지고 있습니다. 그만 진정하십시오"
어느덧 만수산의 서늘한 산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그는 할 수 없이 말에 올라야만 했다.
무심한 말은 정몽주를 싣고 선죽교 돌다리를 향해 걸어갔다. 말이 선죽교에 다다르자 "멈추어라!" 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저녁노을이 지기 시작한 선죽교의 돌다리 위에는 판위위시사 조영규가 가로막아 서 있었다.
"누구요, 누가 우리 대감마님 행차를 가로막는 게오? 정몽주 대감의 행차임을 모르시오?"
겁에 질린 녹사가 조영규의 앞을 가로막으며 외쳤다
"조영규가 여기서 기다린 지 오래였느니라. 비키지 못하겠느냐? 철편의 맛을 보아야 하겠느냐?"
녹사가 울면서 조영규의 몸을 안으려고 뛰어 덤벼들자 몸이 닿기 전에 조영규의 철편이 녹사를 힘껏 갈겼다. 녹사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 버린다.
"자, 대감. 이미 천명이 다하였으니 말에서 내려 철편을 받으시오."
정몽주가 태연한 자세로 말에서 내리는 것을 본 녹사가
"시중대감, 어서 도망가십시오! 역적 조영규는 소인이 막겠습니다."
피를 쏟으면서 땅에 쓰러졌던 녹사가 조영규의 두 다리를 잡고 덤볐으나 조영규의 철편은 여지없이 녹사를 정통으로 맞추었고 녹사는 그만 시체처럼 나뒹굴고 말았다. 이때 말에서 내린 정몽주가 태연히 조영규에게 다가서면 말을 던진다. 추호도 당황하는 빛이 없는 정몽주의 얼굴에서는 오히려 미소마저 감돌고 있는 듯 했다.
"이 시중대감이 시킨 것이 아니라, 이 나라 삼천리의 명령이오.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이를 악문 조영규가 철편을 바짝나꾸어 공격의 자세를 취하자
"이놈, 천하에 죽일놈"
이성계의 분부가 아니라는 말을 들은 정몽주가 천둥 같은 호령을 한다.
"쥐새끼만도 못한 네놈이 감히 천명을 사칭하다니...고려 조정의 녹을 먹는 신자 (臣子)의할 짓이 고작 이거더냐?"
그러나 조영규의 손에 들린 철편은 이미 원을 그리고 있었다.
"컥...."
우뚝 선 자세로 조영규를 노려보던 정몽주의 입, 코, 눈에서는 피가 쏟아져 나왔다.
철편이 정몽주의 머리를 친 것이다.
"에익!"
다시 한 번 뼈 부서지는 무서운 소리가 어둠의 장막이 드리워진 주위에 울려퍼졌다.
"이놈, 역적놈들..."
겨우 한마디 꾸짖는 소리가 쓰러지는 정몽주의 입 밖에서 새어나왔을 때, 조영규의 철편은 세 번째의 원을 그렸다. 만고의 충신 정몽주가 선죽교 돌다리 위에서 털썩 쓰러졌다.
다리 밑에 숨어 이 광경을 지켜보던 방원이 우르르 달려나와 넋을 잃고 서있는 조영규와 나란히 서서 장엄한 충신의 최후를 지켜보고 있었다. 날짜는 공양왕 4년 4월 4일 이었다.
그는 죽임을 당할 줄 알면서도 모친 이씨의 ' 정의를 위해 죽으라.'는 말을 따랐다. 만고의 충절은 새로운 왕조를 새우려는 쿠데타 세력에 의해 피살되므로써 고려와 운명을 함께 하였던 것이다. 그후 조선에서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은 그의 충절을 기려서 그에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그를 문묘에 봉사하였다.
이성계는 이방원의 행동에 분노하여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 집안은 본디 충효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너희들이 마음대로 대신을 죽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내가 이 일을 몰랐다고 여기겠는가? 부모가 자식에게 경서를 가르친 것은 그 차식이 충성하고 효도하기를 원한 것인데 네가 이렇게 불효한 짓을 감히 하니 내가 사약을 먹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 [태조실록, 總序]
◐생려효자 정몽주 [TOP]
선생이 효자 가운데서도 처음으로 되는 생려효자였습니다. 고려 공민왕이 "정몽주가 사는 집에 효자정려를 세워서 그 효성을 밝게 하여라"고 한 것입니다.
고려, 조선 모두 합하여 생려효자가 여덟이 있는데, 포은 선생이 그 처음이었습니다. 관찰사가 예조에 효자를 천거하게 됩니다. 사자(死者)와 생자(生者)를 천거하게 되는데, 대충 사자를 천거하게 됩니다. 그 뒤 예조는 천거된 효자를 심사하게 됩니다. 판정된 효자를 왕에게 보고하여 재가를 받습니다. 왕명으로 정려가 세워집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효자로 천거되기가 극히 드문 일입니다. 살아 있을 때, 왕명으로 세워지는 정려효자를 생려효자라고 부릅니다.
◐포은의 넋이 점지한 능원리의 명당 [TOP]
널리 알다시피 포은은 기울어가는 고려왕조를 회생시키려다 개성 선죽교에 희생되었다. 그때 나이 56세였다. 순절한지 9년 후에야 비로소 그의 충절과 학문이 인정되었다. 조선 태종 즉위년(1401)에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와 익성부원군(益城府院君)의 작훈을 내렸다. 태종 6년(1406) 3월에는 개성의 풍덕에 초장하였던 묘소를 용인군 모현면 능원리 문수산 기슭으로 옮겨, 부인 경주이씨와 합장하였다.
본래는 포은의 면례지가 능원리가 아니었다고 한다. 살피건대, 생전에 용인지역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던 포은의 장례를 지금의 위치에 모실 까닭이 없다. 전설에 의하면, 포은이 선죽교에서 피살된 직후에는 개성의 풍덕에 처음 장례를 지냈었다. 그후 신원되자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 천장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면례 행렬이 지금의 용인군 수지면 풍덕천리에 이르렀을 때 신기한 일이 생겼다. 앞에 내세웠던 명정이 바람에 날려 어디론가 날라가버렸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면례꾼들이 따라가보니 그 명정은 지금의 묘역에 떨어졌다. 지관을 불러 확인해보니 보기드문 명당이었다. 여러 사람들과 숙의한 끝에 포은선생의 뜻으로 알고 그곳에 장례를 모시기로 하였다. 이야말로 포은선생의 넋이 점지한 명당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로인하여 용인지역과는 직접적인 아무런 관련이 없었던 포은선생의 묘소를 용인에 모시게 된 것이다. 그후 그의 후손들이 묘막을 짓고 살기 시작한 이래로 오늘날 능원리는 연일정씨의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
포은선생의 묘소와 관련된 지명으로,수지면에 풍덕내가 있다.이는 본래 [풍덕에서 오신다(豊德來)]는 뜻에서 비롯하였다고 전한다. 그런데 [오신다]의 뜻인 [來]가 후대에 [내(川)]로 변이된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그 유래도 모르고 그저 풍덕천이라고 부른다.
포은선생의 묘소는 1972년에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그후 여러차례에 걸쳐 1980년도에는 묘역의 민가 3채를 이전하고, 신도비각 재실 등 대대적으로 정화사업을 실시하였다. 묘소의 곡담은 본래 벽돌로 쌓았던 것인데, 수백년간 보수하는 과정에서 본래의 것은 거의 소실되고, 곡담 양끝에 몇개만 남아 있다.
포은의 묘역에는 묘표와 신도비가 전한다. 묘표는 조선 중종 12년(1517)에 태학생들이 포은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중종에게 청원하여 세운 것이다. 포은의 묘역에 남아 있는 벽돌이나 묘표 등을 고려 때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잘못이다. 조선조에 비석을 세웠음에도 전면에 [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라고 새겼다. 굳이 벼슬을 고려때 것으로 쓰고, 조선조에 추증된 문충공(文忠公)이라 쓰지 않았다. 그 뜻은 포은이 두 왕조를 섬기지 않겠다는 본뜻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다. 포은선생 신도비는 조선 숙종 25년(1699)에 세웠는데, 현종 때의 문신 김수증이 썼고, 글은 송시열이 지었다. 전액은 김수항이 썼다. 처음에 이 비석을 세울 때 조선조에서 추증한 문형(文衡)의 직함을 새겨 비를 세웠더니, 벼락이 떨어져 파괴되었다고한다. 그래서 고려조의 직함을 다시 새겨 세웠다. 그 이후로는 지금까지 아무런 변고없이 전하고 있다.
◐모현면에 전하는 포은의 유적들 [TOP]
용인지역에서 포은선생의 얼을 기리게 된 것은 묘소를 모신 이후부터이다. 그의 후손들이 모현면 능원리에 묘막을 짓고 거주한 이래로, 지금은 집성촌을 이루었다. 동리명칭도 그 이전에는 쇄포천이었다. 포은선생의 묘소를 모신 뒤에 바로 모현촌으로 지명도 바뀌었다. 묘소 부근의 묘막은 지금의 재실인 [영모재(永慕齋)]로 바뀌었다.
모현 능원리 내곡에는 포은선생 종가가 있으며, 여기에는 가묘(家廟)인 포은영당(圃隱影堂)이 있다. 포은영당은 숙종 5년(1679)에 민정중의 청원으로 임금이 직접 필요한 건축자재를 하사하여 짓게한 건물이다. 영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영당안에는 영정잠실 위패 영정 3점이 있다. 그리고 포은이 생전에 왕래한 서간과 친필이 수록된 {古簡集}과 숙종의 어제어필로 된 추모시첩도 보관되어 있다. 아울러 숙종의 추모시는 3장의 목판에 판각하여 현판으로 걸어놓았다. 이들 자료는 매우 귀중한 것이다. 포은의 종가 가까이에는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한 충렬서원이 있다. 이 서원은 선조9년(1576)에 건립하고, 4년 뒤에 사액되었다. 지금도 서원 입구에 홍살문이 있고, 내외삼문을 비롯하여 강당, 사우 등 서원의 필수적인 시설을 모두 갖추었다. 한 때 이 서원에서 포은과 정암 조광조의 위패를 봉안하였는데, 수지면 상현리에 심곡서원을 건립하면서 정암의 위패는 올겨갔다. 그후 포은의 손자인 설곡 정보(鄭保)와 죽창 이시직(李時稷)을 추가 배향하였다. 대원군의 서원철폐시 훼철된 바 있으나, 그 부당함이 인정되어 곧바로 복원되었다. 충렬서원은 포은을 주벽으로 두 사람의 향사를 모시는 한편으로 교육기관으로서도 충분히 일익을 담당하였던 곳이었다. 용인의 대학자 도암 이재선생이 여러 유림과 학문을 교류하던 곳이기도 하다. 모현면 능원리에 포은의 묘소가 모셔진 이래로 그의 후손들은 물론, 용인지방의 유림들은 대단한 자긍심을 가졌었다. 현재까지도 용인군민은 능원리에 전하는 포은의 유적과 유물을 통해 그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그의 충절은 바로 용인군민의 얼이다.그런데, 웬일인가. 지금은 포은의 묘역 가까이에까지 대중음식점이 뻐젓이 연기를 내뿜고 있다. 포은선생이 순절하신지 어언 600년 지난 지금,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예로부터 성현에게는 신기하고 이상한 사적이 적지 않다. 출생담이나 사후의 이적(異蹟·기이한 행적)을 접하면 당대의 이치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실재한다. 그러기 때문에 더욱 경외하게 된다. 시대가 오랠수록 경외감은 보태지는 반면, 이치는 더욱 묘연해 진다.
포은 선생에게도 여러 가지 이적이 있다. 가령, 개성에는 선죽교의 혈흔이나, 읍비(泣碑)가 있으며, 영천에는 병란 당시 화재에도 타지 않고 남아 있던 임고서원의 영정과 효자비가 있다. 용인의 포은 선생 묘역과 포은신도비도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들에 관한 이야기는 모두 지금까지도 이치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이한 사적들이다.
개성의 선죽교 혈흔과 읍비
조선 정조 때 하남 조유헌이란 사람이 《정포은선생이적기》란 책을 지은 바 있다. 그리고 이 책 말미에 유한준(1732-1811)이 "정포은선생이적기후서"를 지어 붙였다. 제목 그대로 포은 정몽주 선생의 이적기에 붙인 후서이다. 이 글의 대략을 정리해 보인다. 유한준은 "선생에게는 세 가지 이적이 있다. 모두 오래될수록 더욱 드러났다. 당시의 영이(靈異)로운 일은 마땅히 더욱 소명(昭明)해졌다. 그러기 때문에 혈교읍비가 지금까지도 후손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고 하였다. ‘혈교읍비’는 바로 선죽교와 녹사비를 지칭한다.
선죽교와 혈흔
선죽교의 혈흔은 포은 선생이 순절한 지 620년 지났어도 아직까지 실존한다. 선죽교가 유명하는 것은 포은 선생의 혈흔 때문일 것이다. 본래 선죽교에는 돌난간이 없었는데, 1780년(정조4)에 개성유수로 있던 15세손 정호인이 혈흔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선죽교 옆에는 포은 선생과 함께 순절한 녹사의 사적을 새긴 녹사비가 있다. 1641년(인조19)에 개성유수 목서흠이 건립한 것이다. 선죽교에서 매일 밤 울음소리가 들려 선죽교 옆에 녹사비를 세웠는데, 그 뒤로는 그 울음소리가 사라지고 비석 주위에서 오죽(烏竹)이 자라났다고 한다. 이 비석은 항상 습기가 있어 마르지 않는다. 이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읍비라고 하였다. 죽어서도 주군을 위한 녹사의 충정이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칭송한다.
임고서원-포은영정
포은 선생은 1355년(공민왕 4) 부친상을 당하여 묘소에서 3년상을 지냈으며, 그 후 1365년(공민왕14) 11월 모친상을 당하여 묘소에서 3년상을 지냈다. 그의 지극한 효성이 조정에 보고되어 효자 정려의 은전이 내려졌다. 이에 1389년(공양왕 원년) 출생지인 우항리에 "孝子里"라 새긴 표석이 영주(영천) 수령 정유에 의해 세워졌다. 그 후 표석이 오랫동안 실전되었는데 1487년(성종18) 경상감사 손순효의 현몽(죽은 사람이나 신령 따위가 꿈에 나타남)에 의하여 표석을 땅 속에서 찾아냈다. 이때 실전되었던 표석을 다시 세우고 비각도 함께 건립하였다.
임고서원의 영정은 포은 선생의 공신도상을 모사한 것으로 현재 보물 제111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포은영정에도 신이한 이야기가 전한다. 정사년 화재에도 불에 타지 않고 보존되었다는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다.
용인 숭현서원의 이적
유한준은 “영천의 유상에 관한 일인데, 정사년에 서원에 불이 났음은 다 아는 일이고, 기록으로 송도지에도 보인다.”고 하면서, 조유헌의 "정포은선생 이적기"에서 빠진 이야기 하나를 추가하였다.
「용인현에 숭현서원을 세우고 선생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하루는 밤에 도둑이 서원에 들어와 제기, 보궤, 준뢰(술 담는 그릇) 따위를 훔쳐 달아났다. 미처 사당의 문을 나가기 전에 홀현 거인이 사당에서 나왔다. 구렛나루와 눈썹이 희었다. 꾸짖어 말하길 “네가 어찌 감히 훔쳐 가는가.”하였다. 도둑이 놀라서 엎어져 혼절하였다. 새벽에 원생이 문을 열고 배알하고자 하는데 내얼에 시체가 빗겨 있었고, 제기가 그 옆에 있어서 도둑인 것을 알았다. 실오라기가 목구멍 사이에 있어서 물을 조금씩 부어 씻어내니 이윽고 일어났다. 물어보니 과연 도둑이었다. 스스로 그와 같이 말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선생의 신령이라고 생각하였다.」
용인현의 숭현서원은 충렬서원으로 사액되기 이전의 명칭이다. 다른 문헌에도 단편적으로 보이기는 한데, 충렬서원 연혁에는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유한준의 이 기록은 처음으로 소개하는 것이다.
포은의 넋이 점지한 모현면 능원리 명당
포은 선생의 묘소는 본래 해풍군 풍덕에 있었으며, 1406년(태종6) 3월, 모현면 능원리 문수산 기슭으로 천장하여 부인 경주이씨와 합장하였다.
「우리 성조가 천명을 받으려 할 때 공이 절의를 위하여 운명하니 곧 임신년 4월 4일이었으며, 수는 56이었다. 처음에 해풍군에 장사하였다가, 영락 병술년 3월에 용인현의 치소 북쪽에 있는 쇄포촌 언덕에 이장하였다.(及我盛朝 將受命 公伏節以終 乃壬申四月初四日也 壽五十六 初葬于海豊郡 永樂丙戌三月 遷葬于龍仁縣治北?布村之原(함부림, "포은선생행장" [포은선생집]권4) 」
포은 선생의 묘소를 용인으로 천장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전거가 확인되지 않는다. 단지 영천으로 천장하던 중 수지구 풍덕천동에 이르렀을 때 명정이 바람에 날려서 지금의 묘소 위치에 떨어졌기에 안장하였다는 설화만 전할 뿐이다. 이같은 설화가 널리 구전되고 있지만, 포은의 천장지로 정해진 배경을 설명하기엔 미흡하다. 이에 정만조 교수는 정종성의 처가가 죽산에 있었음을 주목하고, 이와 관련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참고: 정만조, "조선시대 용인지역 사족의 동향", 77쪽)
그러나 이같은 추정에는 무리가 따른다. 포은 선생의 천장은 1406년(태종6) 3월에 이루어졌다. 박중용은 이미 18년 전인 1388년(고려, 신우14)에 최영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최영 등이 조반의 옥사를 기화로 이인임·임견미·염흥방 등을 축출할 때 임견미의 족당으로 연루되어 처형당한 것이다. 이때 그의 부친 박형도 연루되어 경남 사천으로 귀양 보내 수자리(국경을 지키는 병사)를 살게 했다. 조선 개국과 함께 예문춘추관대학사가 되고, 찬성사로 벼슬에서 물러났지만, 그 역시 포은 선생의 천장 이전인 1398년(태조7)에 죽었다. 따라서 포은의 천장에 직접 영향을 미쳤거나 용인에 세거하는데 경제적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엔 무리이다.(참고: 필자의 "영일정씨의 용인지역 정착과 세거양상")
용인지역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던 포은 선생의 장지를 지금의 위치에 정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 궁금증을 갖게 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더군다나 증손주 사위 이석형의 묘소와 나란히 안장되어 있어서 더욱 호기심을 갖게 한다. 포은 선생의 묘터는 본래 이석형의 묘터였다고 하는 전설도 구전된다. (참고 필자의 "내고장 옛이야기", 1985)
포은 선생의 묘소와 관련된 지명으로, 수지에 ‘풍덕내’가 있다. 이는 본래 “풍덕에서 온다”는 뜻에서 비롯하였다고 전한다. 그런데 ‘온다’의 뜻의 한자 ‘래(來)’가 후대에 ‘내(川)’로 변이된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 ‘풍덕천’으로 정착한 것이다.
필자는 이처럼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포은 선생의 천장에 관한 전설 외에 다른 기록을 발견하였다. 바로 정조 때의 문인 이덕무(1741-1793)의 "서해여언"이다. 이덕무는 "청장관전서"라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이 책 가운에 "서해여언"이 있다. 서해쪽을 여행하면서 들은 이야기를 정리해 놓은 글이다. 포은 선생과 관련된 부분만 번역해 소개한다.
포은선생-이적기 이덕무의-서해여연
○ 초8일(임술) 새벽에 출발하여 오목천에서 아침밥을 먹고 광탄을 건너 애정에서 자다.
「주인은 포은의 후예였다. 내가 우스갯소리로, “나는 후릉(정종의 능)의 후예지만 지나간 일은 뜬구름 같은 것이니 말할 게 뭐 있겠습니까?”하였더니, 주인도 웃으면서 말하기를, “포은의 아들도 국조에 벼슬하여 이조참의를 지냈는데, 공과 나야 무엇을 혐의롭게 여기고 무엇을 의심할 것입니까. 고려가 망할 때 포은이 임금에게 고하기 위하여 선죽교에 도착하자, 조영규가 말을 달려 동으로 오고 전추가 갈도(소리를 질러 통행을 제한하는 것)하니 포은은 일이 잘못되어 가는 것을 알고 갈도를 그치게 하였습니다. 영규가 내리쳐서 왼쪽 귀를 떨어뜨리고 3일간 목을 효수했는데, 녹사도 함께 죽었으나, 역사에는 그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하면서 말을 마치고는 추연히 눈물이 흐를 듯하였다.
또, “장단에다 장례를 모시려 하였는데 널이 움직이지 않아 지전을 불태우며 빌었더니, 그 재가 남으로 날아가 용인고을 어느 언덕에 떨어졌습니다. 그 언덕에다 장례를 모실 것을 고했더니 그제야 널이 움직였다 합니다. 임진왜란 때 포은의 후예 - (원문 빠짐) -가 그 화상을 안고 연일(延日)로 피난하여 바위틈에다 모셔 두고는 전 식구가 칼을 맞아 죽었는데, 그 후 한 선비의 꿈에 포은이 나타나 그 바위틈을 가리켰으므로 꿈을 깨서 찾아갔더니 과연 화상이 있어, 그 길로 서원을 세워 봉안하였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청장관전서, 권육십이/ 서해여언/초팔일 임술>
이덕무의 <서해여언>은 정조 때의 기록이다. 이때에도 포은 선생의 묘소를 용인으로 천장하게 된 이야기는 관심사였던 것 같다. 용인에 구전되고 있는 전설과도 유사하다. <서해여언>에서는 장단에다 장례를 모시려 하였는데 널이 움직이지 않아 지전을 불태우며 빌었더니, 그 재가 남으로 날아가 용인 고을 어느 언덕에 떨어져서 안장하였다고 전한다. 용인지역 전설에서는 영천으로 장례를 모시려 하였는데, 면례 행렬이 용인의 풍덕내에 이르렀을 때 명정이 바람에 날려 떨어진 곳에 안장하였다고 전한다. 두 이야기 모두 본래의 장지와 달리 신이한 일이 생겨서 지금의 모현면 능원리에 안장하였다는 것에는 다름이 없다. 이치를 따져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이지만 포은 선생이 용인에 영면한 것은 포은선생의 넋이 선택한 것임을 의심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포은신도비도 조선조의 벼슬을 마다하다
포은 선생의 묘역에는 묘표와 신도비가 전한다. 묘표는 조선 중종 12년(1517)에 태학생들이 포은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중종에게 청원하여 세운 것이다. 조선조에 비석을 세웠음에도 전면에 [고려수문하시중정몽주지묘]라고 새겼다. 굳이 벼슬을 고려 때 것으로 쓰고, 조선조에 추증된 문충공이라 쓰지 않았다. 그 뜻은 포은이 두 왕조를 섬기지 않겠다는 본뜻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다.
포은 선생 신도비는 조선 숙종 25년(1699)에 세운 것이다. 처음 신도비를 조성할 때 조선조에서 추증한 관작을 새겼다고 한다. 그랬더니 벼락이 떨어져 파괴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고려조의 직함을 다시 새겨 세웠다. 이후로는 지금까지 아무런 변고 없이 전하고 있다. 이 역시 포은 선생의 이적기에 추가할 사안일 것이다.
선현들의 이적이 이치를 따져 천착되지 않고 구비전승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신비로움이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고, 경외감은 후인들에게 존경심을 더욱 고취한다. 포은 선생의 이적 또한 그럴 것이다. 용인지역 향토사를 이치로 풀기 위해 30년 이상을 고민해온 필자에게 던져진 화두를 이제야 내려놓을 것 같다.
출처 용인시민신문(http://www.yongin21.co.kr)
◐요도(寥島)와 정몽주 [TOP]
요도는 [언양읍지](1919년) 도서조(島嶼條)에 의하면, "언양현에서 일리, 어음리에서 있고 보통 원 아래 밭기슭 가운데 하나의 작은 언덕으로서 이수간(二水間)에 있기에 그렇게 한다(부른다)"고 되어 있다.
(在縣一里於音里普通院下田麓中一培 也二水間故也)
또한 [헌양잡기]에 의하면, 언양현으로부터 동쪽 일리, 보통원 아래에 있는데 곧 밭과 산기슭 사이에 하나의 작은 언덕이다. 삼수 사이에 있는 고로 이름을 삼았다. 정식으로 유배된 죄인이 열두 명있어 매인(每人)에게 초하루에 쌀 석되를 주었고 후에는 배(倍)로 지급하니 민폐를 낳게 되엇다.
(在縣東一里 普通院下 卽田麓間 一小邱也 處二水間 故爲名, 定式流配罪人 十二而每人 朔米三後惑倍給 胎民弊)
보통원이란 중요 관로에 여행자들의 숙식 편의를 위해 언양 어음리에 두었던 치소이다. 이수지간은 현재의 직동천과 남천이 합류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로보아 요도는 언양읍 어음리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위의 기록을 보면 요도는 유배의 적소임을 알 수 있는데, 유배온 사람들 가운데 이름난 이는 고려말의 포은(圃隱) 정몽주와 김흥경(金興慶), 조선조 때 남곡(南谷) 권 해를 들 수 있다. 포은 정몽주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 정책을 반대하다 우왕2년(1375)부터 1년간 이 곳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정몽주선생에 대한 소회(정소성교수) [TOP]
다음 글은 작가이자 단국대 교수이신 정소성교수가 안동지역 출신 재경교수 친목모임인 <동연회통신>에 발표예정으로 쓰여진 "뿌리찾기
옥산서원, 노계서원, 임고서원을 찾아서"(2003. 4. 29)의 글중 포은선생에 관한 글을 발췌한 것이다.
영천 읍내에서 임고서원이 있는 임고면 양항리까지는 뻐스로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비행기를 타고 수평의 삶을 주로 산 나는 드디어 내 삶의 깊이를 헤어려볼 수 있는 역사의 현장 즉 지나가 버린 세월의 거대한 더미 앞에 드디어 서게 된 것이다.
나는 사실 내가 포은 선생의 후손이라는 것 이외에는 내 존재의 깊이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지만 여기 영천 임고면에 포은 선생을 배향하는 서원이 있는 것도 처음 알았다. 용인 어디에 묘소가 있다는 말만 들었지 한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변명을 할 자격이 없겠지만, 나의 서울 생활은 나의 조상들과 그리고 나의 혈족과 완전히 유리된 삶이다. 아직까지 내 동생들과 사촌들은 봉화와 대구 그리고 부산에 흩어져 살고 있다. 그런데다가 나 역시 연구와 강의 그리고 해외여행 소설 집필로 눈코뜰 새 없이 바쁘니 혈족이 거의 살고 있지 않는 고향 봉화를 찾을 기회란 거의 없다시피한 실정이다.
언젠가 월간조선에서 나의 고향이 봉화라 해서 기자와 사진기자와 함께 고향 봉화를 찾아갔으나, 사실 길을 잘 몰라 민망한 적이 있었다. 나는 고향 봉화군 상운면에서 산 적이 없었는데, 기자가 상운면 장터에서 막걸리 마시는 사진을 찍자고 하여 참으로 난감했었다.
봉화는 나의 고향이라기 보다 부모님의 고향이다. 아주 일찍이 여기를 떠나버렸던 것이다. 객지를 떠도는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성장했다.
연세 높으신 다른 회원들이 나의 이름을 불러대었다. 이분들은 벌써 내가 영일을 본관으로 하는 정씨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정교수, 분향하고 재배하시오!"
"포은은 우리 한민족의 충절의 표상같은 분이야. 고려 조선 양조에 떠받들리는 분은 포은뿐이야!"
"포은이 있어 점필재가 있고, 점필재가 있어야 회재가 있지. 회재 없는 퇴계가 있나! 퇴계없는 우암도 어렵고!"
한문의 대가들은 한마디씩 던지면서 고옥 높다란 벽면에 붙어 있는 한문 시가들을 읽고 있었다. 서원이란 본래 선현을 제사 지내는 사(祀)와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제(薺)의 기능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나는 구두를 벗고 위패 앞으로 올라갔다. 나는 지금 내가 올라가고 있는 데가 사우인지 제사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설마하니 지금 여기서 학생을 가르칠 턱이 없으니 아무래도 사우인 듯했다.
벌써 김용직 교수가 사당으로 올라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용직 교수는 한시를 지어 읊조릴 정도의 한문 실력을 갖춘 분이다. 진정 변하지 않은 안동인의 면모를 그대로 간직한 학자가 있다면 아무래도 향천 김용직 선생이 아닌가 한다. 우리 두 사람은 분향하고 재배하였다. 아마도 영정이 걸려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작년말인가, 김경동선생과 김용직 선생이 학술원 회원으로 뽑혔다. 동연회라는 모임으로 봐서는 커다란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김경동선생은 미국 듀크대학 교수와 서울대 교수를 역임한 사회학자이고, 향천 김용직선생은 한문이 자유로운 드물게 보는 국문학자이다.
아내가 재빠르게 재배하는 나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웬지 모르게 참으로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줄 떨어진 세파드처럼 황야를 마구 쏘다니다가 허기를 못이겨 옛주인의 집으로 다시 돌아온 기분같은 것을 나는 느꼈다. 그러나 나는 얼떨결에 재배를 하느라고 조금의 희사금도 올리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니 이것이 참으로 후회스럽다. 조상을 섬기는 혈족들의 수고를 위해서라도 한 십만원은 놓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생전처음 시조 조상 영정 앞에 선 놈이 빈손이었다니 역시 불충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었다. 조상께서 나는 너같은 녀석을 후손으로 둔 적이 없다고 호령하실 것만 같다.
서원 측에서 내어놓는 <포은 정몽주 선생 사적집>을 한권 받았다. 나는 귀가 후 이 책을 정독하는데 일주일이 걸렸다. 참으로 많은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이 책 안에는 포은 선생의 영정 한 폭이 들어 있었는데, 동네 표구집에 갖다맡겼다.
내가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된 포은 선생에 대한 사항 중에서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만 추려서 몇가지만 적어 보려 한다. 포은공의 진면목을 아는데 참고가 될까해서 이다.
포은은 무엇보다도 출중한 한문실력을 갖추었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었다. 이것은 어떤 역사적 인물을 언급할 때 항용 하는 소리가 절대 아니다.
그는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3장으로 되어 있는 과거장에서 그는 3장 다 장원을 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그가 명나라에 갔을 때 말이 통하지 않아 글을 지어 의사를 소통하였는데, 그가 쓰는 문장이 너무나 아름다워 도저히 중국의 학자들이 당해내지를 못하였다고 한다. 그야말로 진정 중국의 사서삼경을 제대로 해석하는 조선의 학자라고 칭송하였다.조선의 기라성같은 성리학자들이 자신들의 학문의 비조로 누구나 포은을 꼽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목은 이색, 퇴계 이황, 고봉 기대승, 사계 김장생, 하서 김인후, 서애 유성룡, 율곡 이이, 점필재 김종직등은 입을 모아 포은을 동방이학지조로 추승하고 있다. 선조 조의 명현이며 퇴계의 후학인 지산 조호익은 이런 말을 하였다.
"일찍이 듣자하니 주자의 사서집주가 우리 동방에 유행하였는데, 그 뜻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오직 포은 선생만이 그것을 정미하게 분석하여 해설하였다. 마침내 상국 운봉호씨 호병문의 사서통이 전래되어 포은 선생의 논설이 모두 그와 부합되었다. 이에 비로소 당시의 사람들은 포은선생이 도학에 깊은 것을 탄복하였다."
포은은 성리학에 정통하였으므로 누구보다 부모에 효도하였다. 아버지 일성 부원군이 졸하였을 때 그는 여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하였으며, 어머니 변한국부인이 졸하였을 때도 하루도 모자람이 없는 3년 시묘를 하였다. 그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원나라와 수백년간 교유한 관계로 당시 사회에서는 부모 탈상을 일년 혹은 100일에 하는 풍조가 유행하고 있었다. 그는 태산같은 심지로 부모의 묘를 도합 6년이나 지켰던 것이다. 사람들은 포은의 효도에 다들 혀를 내둘렀다.
그의 이런 효심은 결국 국가에 대한 충절로 승화하였다.
그리고 포은은 내직의 명신일 뿐만 아니라,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희대의 외교관이었다. 그는 중국을 두 번이나 왕래하여 두 나라간의 현안을 절묘하게 해결하였으며, 일본을 일년이나 체류하면서 역시 두 나라 간의 현안을 쉽게 해결하였다.
포은은 공민왕21(1372)년에 서장관으로 지밀직지사 홍사범을 따라 명나라를 다녀왔다. 명 태조가 촉나라를 멸한 것을 축하하기 위한 행차였다. 가을에 돌아오는 길에 바다 가운데 떠있는 허산에서 광풍을 만나 배가 뒤집히게 되었다. 정사 홍사범은 익사하고 다른 수십명의 사람들도 다 익사하였다. 오직 포은만 겨우 살아 무인도에 오르게 되었다. 마침 지나가는 중국 배가 있어서 구원을 요청한 바, 소식이 명나라 조정에 알려졌다. 명태조는 그 영특한 조선의 젊은 사신을 기억하고 즉시 구원배를 보냈다. 명나라 조정으로 입조한 포은은 이듬해까지 유하다가 후한 대접을 받고 귀국하였다.
명이 건국하였을 때 고려 조정에서는 양파로 갈라졌다. 명을 따르자는 파와 원을 그대로 섬기자는 파가 그것이다. 친원파로는 당시의 권신인 이인임이 있었다. 그는 적극적으로 친원정책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공민왕이 살해되고, 명의 사신이 피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포은의 적극적인 주장으로 사신을 미리 보내 백배사과함으로써 전화를 막았다. 그러나 과거의 관계 유지를 원하는 원의 청을 들어주기를 단호히 거부하는 포은은 이들 친원파의 가시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한때 포은은 언양으로 귀양을 간 적도 있었다.
귀양에서 돌아온 포은은 일본으로 건너가(1377) 군자지도로써 그들을 교화하고 끝내는 스승으로 떠받들려 일년이상 체류하면서 사서삼경을 강의하였으며, 귀국시에는 그들이 잡아가둔 먼저간 사신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일본에서 돌아온 포은은 드디어 정당문학에 올랐다. 그의 앞에 거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명과의 관계가 순조롭지 못했다. 계속해서 조정에 친원파가 가시지 않았는데다, 명 건국시 약조한 세공물을 제대로 보내지 않았다. 양마 5000필, 금 500근, 은 5만냥을 5년 동안 제대로 보내지 않았다고 해서 찾아온 사신 홍상재 김보생들을 볼기를 쳐서 명나라 빈촌으로 귀양을 보내 버린 것이다. 마침 명고황제의 생일을 맞아 성절을 축하하러 보내야 할 판인데 홍상재 경우가 있어서 누구든 가고자 하는 사람이 없었다. 상태가 홍상재 때보다 더욱 악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왕이 밀직부사 진평중을 지명했으나, 진은 겁을 집어먹고 칭병하여 집에 칩거하면서 많은 노예와 전답을 실권자 임견미에게 주어 자신을 빼고 포은을 보낼 것을 간청하였다.임견미의 의견을 들은 우왕은 포은을 지명하였다.
"경은 임무를 다할 수 있겠는가?"
"임금의 말이라면 불구덩이 속으로라도 들어가야 합니다. 어찌 소신이 거절을 하오리까! 다만 한가지 걱정이 있습니다."
"무슨 걱정인가?"
"개경에서 남경까지 팔천리인데 발해만에서 바람을 피하기 위해 10일은 보내야 함으로 최소한 90일은 걸여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60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걱정입니다."
"으음 어쩔 작정인가?"
"잠을 자지 않고 밤낮으로 걸어보겠나이다."
"으음...잘 해보게나!"
포은은 그길로 귀가도 하지 않고 길을 떠났다. 그는 말 위에서 잠을 자면서 길을 채촉한 결과 명태조 생일날 바로 새벽에 남경에 이르렀다. 축하문과 조공물을 받은 명의 고황제는 만족하여 조선 사신의 접견을 허락하였다. 포은을 보고서는
"아니 너는 전번에 고려국에서 왔던 그 젊은 사신이 아니더냐? 배가 파선해서 우리 조정에서 일년을 머물고 돌아가지 않았더냐!"
"그러하옵니다."
"그래 네가 고려국에서 우리 중국말을 할 줄 아는 유일한 대신이더냐?"
"그렇게 유창하지 못하옵니다."
"아니다 너는 중국말을 잘 하는구나. 너희 나라가 지은 죄가 있어서 사은사절을 보내고자 했으나 응하는 대신이 없어서 미루고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래 네가 왔느냐?"
"네 그러하옵니다."
"60일만에 왔다는데,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올 수 있었느냐?"
"말 위에서 자고 걸으면서 잤나이다. 단 한번도 몸을 땅에 누이고 자지 않았나이다."
"으음 가상하다. 기특한지고. 그래 귀국시 원이 있느냐?"
"폐하 전번 사신으로 왔다가 상의 눈 밖에 나서 볼기를 맞고 귀양간 고려국 사신들을 풀어주옵소서."
"오냐, 괘심한 놈들이지만 네가 가상하니 풀어주겠다."
포은은 홍상재 등 귀양간 고려국 사신 전원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포은의 효심과 나라와 임금에 대한 충절 그리고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사서삼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 그리고 개경에 5부학당을 짓고 지방에 향교를 지어 대대적으로 성리학을 보급하는 뛰어난 행정력 등 누구도 포은을 넘어 설 수 없었다.
게다가 그는 해박한 병에 대한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칼을 쓰고 활을 쏘는 병사는 아니었지만,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병략가였다. 공민양 13년에 이성계를 관북지방으로 호종하여 여진족장 삼선삼개를 화주에서 쳐서 궤멸시켰다. 이어 왜구를 격멸하기 위한 전라도 황산 전투에서 이성계의 조전장수로서 그가 승리를 이끄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이성계가 황산대첩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자신의 관향인 전주에 들려 축하의 자리를 마련했을 때, 특별히 막하 장수 포은을 극찬하였으며 조금은 두려움까지 표하였다. 그는 진정 병장기를 다루지는 않았으나, 부하를 통솔하고 전략을 짜는데 어떤 장수보다도 훨씬 더 능숙하였다. 이방원이 막료 조영규를 시켜 포은을 선죽교에서 격살한 것도 포은이 병을 모을 수 있고 병을 아는 장수였기 때문이었다. 그를 따르는 병졸들이 많았다. 포은이 붓과 책만 아는 문사였다면 그런 살해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포은은 이성계와 이방원을 격살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자니 포은은 애오라지 글장이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신하로서 포은의 충절과 역량, 학자로서의 해박한 예지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폭은 고려조정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런 포은이 쇠망치에 얻어맞고 격살되었으니 그 충격은 어떻했겠는가. 사실 포은을 복권시킨 사람도 그를 죽인 이방원이었다. 그를 따르는 조선국의 선비와 일반 백생들을 도저히 저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앞다투어 포은을 서원과 사당에 자신들의 조상들과 함께 모시는 것이었다.
이 광명한 민주 자본 주의 사회에서도 그 옛날 인간의 성정을 근본적으로 제한하는 성리학의 비조인 포은을 자신들의 정신적인 지주로 모시는 전국의 사당과 서원은 서른 개를 넘을 지경이다.
조선의 성리학의 대학자들에게 포은만큼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흉내 낼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뛰어넘을 수 없는 위대한 거봉이었다. 포은이 이런 거봉이었기 때문이었을까 그의 후손들은 사실 그 그늘에 가리어 오히려 왜소한 감을 준다. 조선 500년 사에 영상에 오른 영일정씨는 영조 조의 정호 한 사람뿐이다. 그리고 정철, 정유성, 정우량, 정휘량 등이 우의정 좌의정에 올랐다.
영일 정씨의 시조는 신라시대로 거슬러올라간다. 신라 초기 6부족의 하나인 진지부의 촌장 지백호에게 유리왕 9년에 정씨 성이 사성된 것이 이 성씨의 시초라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 후에 지백호의 자손에 대한 기록이 유실되어 그 계대를 헤아릴 길이 없다. 다만 그의 원손의 한 분인 종의가 도시조로 추앙되었고, 그의 후손 중에 영일현백에 호봉된 사람이 있어서, 영일을 본관으로 하는 영일정씨가 탄생되었다. 영일의 원마을의 이름을 따서 오천 정씨라고 부르기도 한다. 영일 정씨에는 두 파가 있는데, 고려 의종조에 지주사를 지낸 지주사공파가 있으며, 여기에서 포은이 배출되었다. 그리고 한 파는 역시 고려조에 감무공을 지낸 감무공파가 있으며 여기서는 송강 정철이 배출되었다. 지주사 공파에는 또다시 8개파가 있는데, 필자는 바로 제 1파에 속하며, 거기에서 다시 참의공파에 속하는 22대 손이다. 지주사공파로는 32대에 속한다.
나의 노모 인동장씨는 현 구미시 인동동을 관향으로 하고 있다. 인동 장씨에는 장규 계보와 장금용 계보가 있는데, 인구수가 막상막하이다. 노모의 치매가 심하여 어머님이 어느 계보인지 확인할 수 없다. 외삼촌들이 계시나 지금 당장 연락이 닿지 않는다. 그러나 세보를 자세히 읽어보면, 장규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계보 12대 때 일단의 인동장씨들이 봉화로 이주하여 집성촌을 이루어 살았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어머니의 친정이 바로 봉화군 상운면이다. 인동 장씨 중에서 조선조에 상신(영,좌,우의정)에 오른 사람은 양 계보를 합해 단 한사람이다. 중중조에 영의정을 지낸 장순손이 그 사람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영일 정씨의 어른들은 자신들의 조상인 포은공을 위해 많은 사업을 벌리고 있었다. 우선 여기 임고서원을 대대적으로 확장하고 성역화사업을 추진하여왔다. 그래서 상당한 규모의 서원을 복구하고 확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동의 도산서원에 비하면 아직 멀었다.
비교가 불가능한 일이지만, 포은과 퇴계를 억지로 비교해 보는 것도 무익하지는 않으리라.
포은은 우선 충절의 신하이고, 퇴계는 사직에의 봉사를 제한하고 자신의 서재로 들어간 학자이다. 두 분 사이에는 이런 절대적인 차이가 있다. 포은은 후세인의 감정과 가슴에 호소하지만 퇴계는 머리에 호소한다. 어느 편이 더 감동적일까 하는 것은 내가 할 말이 아니다.퇴계를 흠모하여 그의 학문을 연구하는 후세인은 많아도, 그를 사당이나 서원에 배향하는 후손은 포은에 비하여 아주 적다. 퇴계는 절경인 안동 도산에 서원를 건립하였고, 안동이라는 도시가 가지는 유교적 회고적 분위기와 주변에 위치한 신비스런 강변마을인 하회 등과 메치되어 많은 국민들의 방문지로 떠올랐다. 이런 지리적인 이점을 퇴계와 도산서원은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나의 강변일까.
그러나 임고서원의 위치인 영천은, 영남의 웅도인 대구에 가려있고 천년 고도 경주에도 가려 있으며 국내 최대 공업도시인 울산에 또 가려 이중 삼종의 빗장을 지르고 있는 형편이다.이런 지리적 특성을 가진 도시인 영천은 사실 어떤 특징을 뚜렷이 가진 도시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임고 서원을 통한 포은의 정신이 더욱 알려져 서구문화의 무분별한 유입으로 지금껏 흔들리는 국민의 정서를 바로잡는데 기여케 했으면 한다.
그리고 종중땅 백만평을 팔아 서울 동대문구에 포은 회관을 7층으로 건립하였다. 대대적인 임대사업을 벌리고, 그 수입으로 각종 제사와 사우를 보수 관리하고,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리고 용인 묘소를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훌륭한 조상의 사당을 처음 찾은 까마득한 후손의 죄스러움이 가슴을 쓸어왔다. 일행에 묻혀 서원을 떠나면서 나는 한 개인은 자신이 존재했던 시대에 동시대인들과의 관계를 가지면서 수평적으로 존재하기도 하지만, 아울러 사후 한 성씨의 계파 속으로 들어가 작은 매듭이 됨으로서 사후를 사는 수직적인 삶을 살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나는 영일정씨 피의 흐름의 한 매듭에 불과한 것이다. 몇백년 몇 천년이 흐른 후에 영일 정씨 나의 후손들은 나를 어떤 매듭으로 볼 것인가.
모든 영일정씨들은 포은을 모신다. 그러나 정작 포은 공파는 숫자가 많지 않다. 포은공의 5대 선조에서 파가 갈라졌기 때문이다. 더 올라가면 포은 공의 10대 조에서 벌써 갈라져 그들은 지주사공파와 감무공파로 흩어진다. 포은공의 피를 받은 순수 피흐름으로 보면 제1파 포은공파 이외에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그러나 모든 영일정씨들이 포은공을 모시니, 그것은 그만큼 포은공의 공덕이 큼을 말함이니, 어찌 말릴 수 있겠는가. 어차피 영일정씨의 중시조, 즉 포은공의 10대 할아버지 지주사 습명의 자손들이 아닌가.
포은공은 종성 종본 두 아드임을 두셨고, 종성은 <보>라는 아들을 두셨다. 보는 윤정, 윤화, 윤관의 세 아드님을 두셨는데, 바로 셋째 아드님이신 윤관 선조가 나의 파조가 되시는 분이다. 바로 영일정씨 참의공파의 시조이시다.
포은공이 이방원이 보낸 자객 조영규와 고여배의 철퇴를 맞고 비명에 가셨을 때, 맏아드님은 춘추 19세였다. 어떤 관직도 거절하고 와신상담 비통한 세월을 보냈다. 태종원년에 포은공이 복권되고 영의정에 추증되어 다소 울분이 풀렸으나 맏아드님은 결코 이씨 사직에는 나가지 않았다. 2품직인 지사에 제수되었으나 거절하여 결국 하옥되는 수난을 겪였다. 그러나 세종 때 포은공이 충신 제일 서열에 오르자, 그제서야 벼슬에 나가, 64세의 노경에 철원 부사를 받아 떠났고 이어 이조 참의로 승차하였고, 69세의 나이가 되어 노령을 핑계하고 사직을 주장하였으나 세종은 윤허하지 않고 첨지중추원사로 삼았다. 오직 선고 포은공의 문집 꾸미기에 여생을 바쳤다. 진산부원군 하륜과 예문관제학 변계량의 서문을 받았으며, 더욱 산고를 수집보강하여 포은공의 문인인 박신의 서문을 받았으며, 모인 유고를 세종에게 진납하였던 바, 그 내용의 뛰어남에 놀란 세종은 보문관 직제학 권채에게 편찬을 명하였다. 세종 21년(1439)에 포은문집이 드디어 처음으로 인출되었다.
동생 종본은 조선 사직에서 성균관사예에까지 오르긴 했으나, 선고의 참사가 있고 난 후 절대적으로 출사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형 종성과 함께, 선고 포은공이 조선 사직에 의해 충신서열 일등의 대우를 받게 되자 울분이 조금은 풀렸다. 64세의 노경으로 세종의 명소를 거절하지 못하고 곡산군수를 수락하셨다. 영일정씨 사예공파의 시조로서 수많은 명현을 배출하였다.
포은공의 장손인 보(설곡공)는 사마시에 올라 예안현감을 거쳐 사헌부감찰에 이르렀다. 성격이 강직하고 사직에 충성심이 강해 감히 소인들이 범접하지 못했다. 세조가 사육신을 죽이려 하는 때, 설곡공은 권신 한명회와는 가까운 친구였고, 또 서매가 명회의 애첩이었다. 그래서 그는 성삼문과 박팽년을 죽이면 상이 하늘의 죄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명회가 이 말을 상에게 고하였고, 세조는 설곡공을 환형(찢어죽이는 형벌)을 가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이 이 자가 바로 포은공의 장손이라고 고하자, 세조는 공을 영일에 유배케 했다. 적소에서 죽으니, 가족은 적몰되고 전답은 저폐되어 거대학자가 일조에 무로 돌아갔다. 설곡공은 3남 6녀를 두었는데, 삼남은 위에서 말하였다. 4녀가 판서를 지낸 여주 사람 이계손에게 시집갔다. 설곡공의 3자 윤관 공은 계유 사마 양시에 급제하였으며, 향년 76세로 졸하였다. 사후 통정대부. 이조참의가 귀증되었다. 경남 산청군 신안면 청현리 문태촌 비느리에 위치한 남간제가 묘재이다.
▣소재지 :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 산3번지
▣문화재지정 : 경기도 기념물 제1호
경부고속도로 판교 인터체인지에서 빠져 나가 389번 도로를 타고 분당 아파트단지를 지난 다음 고개 하나를 넘으면 모현면 오포농협 3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에서 우회전하여43번 국도로 1km 가까이 가면 오른쪽에 비각이 하나 서 있고, 왼쪽으로 정몽주선생 묘소로 들어가는 영모교가 보인다.
여기에서 다시 좌회전하여 다리를 건너 500m 즘 올라가면 선생의 신도비각이 있고, 다시 좀 더 오르면 영모당과 선생의 후손이 살면서 묘소를 관리하는 살림집이 나온다.
묘소는 영모당 뒷산인 문수산(文秀山) 안자락 해발 145m의 나지막한 양지바른 언덕 위에 있고, 묘비에는 고려 수문하시중 정몽주의 묘(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라고 쓰여 있다. 선생을 죽인 태종 이방원이 왕위에 오른 후에 양심의 가책 때문인지, 아니면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 였는지 모르지만 문충공(文忠公)이란 시호와 함께 영의정을 추증했으나 그의 후손이나 후학들은 이를 한번도 사용한 적이 없다고 한다.
선생과 별다른 연고가 없는 이곳에 선생의 묘를 쓰게 된 것은 처음 순절하신 후 버려진 시신을 송악산 중들이 염습하여 풍덕(豊德)땅에 묻었던 것을 후일 고향인 영천으로 이장하던 중, 장례 행렬이 이 인근인 용인군 수지면 경계에 이르자 명정(銘旌)이 세찬 바람에 날려 이곳에 떨어져 지관에게 물어보니 명당중의 명당이라 이곳으로 하였다고 한다. 1517년(중종 12년) 왕명에 의하여 포은 정몽주 할아버지 문묘에 매향하는 한편 묘소를 환봉 청산하고 묘역 일대 임야 전담 등 2백40여만평을 사패지(賜牌地 : 나라에서 내려 준 땅)로 지정하여 경계를 표시하고 산직을 두어 초목을 금하게 하는 등 묘소를 관리토록 하였다.
그 뒤 약 600년 동안 포은 정몽주 할아버지는 종손 집안을 중심으로 문중들이 묘소를 잘 관리해 왔으며 1982년에 영일정씨 포은공파 종약원이 정식으로 설립되어 종약원에서 묘소와 묘역일체를 정성껏 관리하고 있다.
1972년 12월에 상석 2개를 교체하였고 1974년 12월에는 곡담 35m를 보수하였으며 문중에서는 봉분 병풍석, 난간석, 장명등, 망부석 등을 설치하였다. 1980년에는 묘지 경내의 민가 3채를 이전하고 묘지 입구에 신도비각을 세운 것을 비롯하여 영모재(永募霽)를 해체 복원하고 주차장도 마련하였다.
아이러니칼 하게도 이방원이 조선 제3대 임금 태종으로 즉위한 다음 지금까지 역적으로 취급된 정몽주에게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正一品 加資)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正一品職) 수문전대제학(修文殿大提學: 正二品職) 감예문춘추관사(監藝文春秋館事: 正一品職)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 一品職에 오른 功臣의 封號)으로 추증(追贈: 죽은 후에 직위, 봉작, 시호 등을 내리는 것)되고, 시호 문충(文忠)이 내려졌으며 그 후 중종 때에는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고려의 충신으로 조선창업에 반대하여 역적으로 취급된 정몽주가 조선조 초기 그것도 그를 심복에게 죽이도록 사주한 태종에 의하여 복권되어 외관상으로는 명예가 회복되고 융숭하게 대접을 받은 것이다. 그 후 어느 때인지는 자세히 모르겠으나 역적으로 송도 어느 산야에 묻혀 있던 정몽주의 묘를 한양 인근으로 이장하였는데 그 곳이 지금의 용인군 모현면 능원리 문수산 남쪽 기슭이다.
정몽주의 묘를 이 곳으로 이장하면서 왕능(王陵)의 격식을 갖추어 둘레석과, 문무관석 등을 설치하였기 때문에 이 마을은 능원리(陵院里)라는 이름까지 얻었고, 이 마을에는 정몽주의 묘 뿐만 아니라 정몽주사당과 하마비(下馬碑: 지나는 사람은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라는 경고의 비석)까지 세워졌다.
정몽주의 묘가 있는 문수산은 남쪽으로 4개의 능선을 뻐치고 있데 양쪽 2개는 길게 뻗어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를 이루고 가운데 2개 능선은 약 40m 간격으로 나란히 짧게 끝난다. 문수산을 바라보면서 왼쪽 날등에 포은의 묘(능)가 있고, 오른쪽 날등에는 저헌(樗軒) 이석형(李石亨: 태종15년 1415-성종8년 1477)선생의 묘가 있다. 모두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석형은 세종23년에 생원과, 진사과, 문과에 동시에 장원하여 한 방(榜: 과거 급제자 발표)에 세 개의 장원이 오른 조선조 최초의 삼장원(三壯元)이 되고, 세종25년에는 호당(湖堂: 일명 賜暇讀書라고도 하는 유망 인제 연수제도)에 뽑히고 신숙주와 성삼문 등 이른바 사육신들과 10여년간 집현전 학사로 있으면서 세종대왕의 문화창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세조의 왕위 찬탈 후 사육신 사건 때는 전라감사로 원지에 나가 있어 동참하지는 않았으나 사육신과의 특수한 관계 때문에 세조로부터 항상 우대를 받아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正一品加資)에 까지 올랐으면서도 한명회 등 그 측근들에게 항상 견제를 받아 육조판서나 정승에는 오르지 못하고 실권 없는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正二品), 수문전제학(修文殿提學: 從二品),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 正二品) 등의 직위에만 올랐으며, 최종 관직은 판중주부사(判中樞府事: 從一品)였다. 성종 2년에 시행한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록되어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문강(文康)이 내려졌으며 많은 시문을 남긴 사람이다.
이석형의 묘에 합부(合?)된 전배(前配) 연일정씨(延日鄭氏) 오늘 이 글 ‘출가외인’의 장본인인데 바로 정몽주선생의 증손녀(曾孫女)이니까 이석형은 정몽주 선생의 증손서이다.
연일정씨가 이석형과 혼인한 후에도 남편 이석형은 벼슬살이 하느라고 한양에 가 있었지만 부인은 그냥 향촌인 이 곳 문수산 아래 살고 있었다. 지관을 들여 문수산 일대를 둘러 본 결과 가운데 2개 날등 중에서 오른 쪽이 아주 명당이라는 언질을 받아 장차 이석형의 묘자리로 점 찍어 놓았다.
그런데 나라에서 정몽주의 묘를 이장 할 곳을 바로 문수산으로 정하고 다음날 지관이 묘 터를 보러 온다는 전갈이 왔다. 연일정씨는 밤중에 산아래 천수답에 물을 대는 물웅덩이에서 물동이로 물을 퍼 날라 오른쪽 날등에 갖다 붇기를 밤새도록 하였다.
다음날 조정에서 보낸 지관이 먼 앞산에서 문수산을 바라보고 가운데 두 날등이 다 괜찮은데 오른쪽 날등이 아주 좋다는 결론을 내리고 현장으로 갔다. 현장에 도착한 지관은 오른쪽 날등이 축축하게 물이 나고 있는 것을 보고 ‘아! 아깝다. 이 좋은 자리에 물이 나니 묘자리로는 안되겠다’ 하면서 왼쪽 날등으로 결정하고 돌아가 정몽주 묘는 왼쪽 날등에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석형이 죽은 후 오른쪽 날등에다 묘를 썼다. 이석형의 후손은 아주 번창하였다. 그 후손 중에는
① 8정승(八政丞: 인조6년 李廷龜, 효종원년 李時白, 영조28년 李天輔, 영조34년 李후, 정조6년 李福源, 정조12년 李性源, 정조23년 李時秀, 순조27년 李存秀),
② 삼대대제학(三代大提學)을 비록하여 대제학 6인(선조34년 李廷龜, 인조9년 李明漢, 효종10년 李一相 삼대대제학, 영조37년 李鼎輔, 영조48년 李福源, 순조1년 李晩秀 2대대제학),
③ 조선조 대표적인 문장가 월상계택(月象鷄澤: 月沙 李廷龜, 象村 申欽, 鷄谷 張維, 澤堂 李植)의 월사 이정구를 비롯하여 문장가록(文章家錄)에 오른 4인(李石亨, 李廷龜, 李明漢, 李天輔),
④ 인조반정을 주모하여 성공으로 이끈 정사공신(靖社功臣) 삼부자(三父子: 부 李貴 1등 延平府院君, 장자 李時白 2등 延陽府院君, 3자 李時昉 2등 延城君),
⑤ 육조(六曹) 판서(判書: 正二品) 37인,
⑥ 2대 3부원군(府院君), 9대 11인의 봉군(封君:1대 李貴 延平府院君, 2대 李時白 延陽府院君, 李時聃 延豊府院君, 李時昉 延城君, 3대 李炘 延昌君, 4대 李相胃 延城君, 5대 李泳 延恩君, 6대 李明熙 延原君, 7대 李瑜 延陵君, 8대 李度陽 延川君, 9대 李押 延豊君) 등을 배출하는 반면 한 사람의 역신이나 탐관오리가 나오지 않았고, 청백리(淸白吏)와 충효절열(忠孝節烈)이 줄을 이어 나왔다.
이렇게 후손이 융성한 것이 이석형의 묘자리 때문이라 것이 현대 과학적인 사고로는 허무맹랑한 것이겠지만 옛날 풍수지리설을 믿던 시절에 사람들은 그렇게 믿어왔던 것이다.
하기는 요즈음도 부친의 묘자리를 잘 잡아 이장하였기 때문에 -그것도 이 이야기와 관련이 있는 용인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고 믿는 사람이 있으니 옛날에는 그것이 부동의 진리라고 믿었던 것이 사실일 것이다.
◐정몽주의 묘와 풍수지리 [TOP]
[출전: 김두규, 한국풍수의 허와 실, 동학사 1995]에서 축약 정몽주 墓와 혈의 네 가지 종류(四象)
풍수지리에 관심을 갖는 이들에게 권장할 만한 것은 '이름난 명당들을 직접 답산 하라!'는 것이다. 대개 역사상 이름을 남긴 인물들이나 권문세가들은 풍수지리에 의거하여 명당이라고 알려진 곳에 무덤을 섰다. 따라서 답산을 많이 하다 보면 부지불식간에 이들 명당들에게 공통적인 점들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무덤 뒤에 있는 산(主山)의 모양, 주산에서 무덤이 쓰여진 곳까지의 산줄기(來龍)의 모습, 무덤이 쓰여진 곳(穴, 당판 혹은 혈장이라 부름)의 모습, 좌우 주변 국세(청룡, 백호, 안산 등)의 모습, 무덤 앞에 흐르는 물의 방향이나 흐름세 등등에서 공통적인 모습이 떠오르게 된다. 그 정도의 단계에 이를 때 한글로 출판된 풍수지리 이론서 읽기를 권한다.
시중에 나도는 책 가운데에 '아무개에 명당을 잡아 주었더니 대통령이 되었더라' 등과 같은 무협지에서나 볼 수 있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써 놓은 책들이나 풍수(명당)소설들은 권장할 것이 못된다. 풍수지리에 대한 접근을 그만큼 어렵게만 할 뿐이다. 명당이라고 알려진 곳들을 많이 답산한 후에 풍수 이론서를 읽게 되면 책에서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게 된다: "아하!, 책에 쓰여진 그 구절은 내가 보았던 아무개 명당의 모습을 연상시키는구나!" 등과 같은 생각이 들 것이다.
소문난 명당들을 답산 하고 동시에 풍수 이론서를 몇 권 선정하여 반복하여 읽다 보면 자연스레 명당(眞穴)의 眞僞 여부를 구별하게 된다. 또한 많은 명당들을 보고 난 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자신이 보와 왔던 그 수많은 명당들이 몇 가지 유형에 모두 귀속시킬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그 과정에서 또한 많은 풍수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들의 의견을 참고하되 자신이 답사한 산과 읽은 서적을 참고하여 취사선택하면 된다.
그러한 연유로 많은 풍수지리서들이 명당의 모범이 될 만한 옛 무덤들을 많이 볼 것을 권장하였다("不可不觀古格")
이번호에서는 풍수의 문외한이라도 "정말 특이하구나!", "명당이란 이런 것이구나!"라고 인정할 만 한 포은 정몽주의 묘를 예로 들면서 明堂(진혈)의 유형을 설명한다.
천하의 그 어떤 大明堂이라도, 또는 어떠한 기혈(奇穴)이나 괴혈(怪穴)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진실로 명당(진혈)이라면 고전적 풍수지리서가 분류하는 명당의 네 가지 종류(四象, 四像, 穴形四大格 등으로 표현함)중에 하나에 귀속되어야 한다. 또한 풍수(지관)들은 어떤 자리를 놓고 명당(진혈)이라고 감정을 한다면 그것이 명당(진혈)의 네 가지 종류 중에서 어떤 것에 귀속되며 왜 그렇게 분류하였는지를 설명할 줄 알아야 한다.
혈(명당)에는 와(窩), 겸(鉗), 유(乳), 돌(突)혈 네 가지 종류가 있다.
정몽주 무덤의 경우 상기 네 가지 종류 가운데 하나에 귀속시키자면 유혈에 속한다. 단지 하나의 혈만 그곳에 잇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옆에 또 하나의 유혈이 나란히 있어 마치 처녀의 두 개의 젖가슴이 나란히 있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것을 일러 '두 개의 늘어진 유방 명당("雙垂乳")이라 부른다.
이 두 개의 유혈 명당 중에 우측(산에서 바라보아)에 포은이 안장되어 있고 좌측에는 손녀 사위인 이석형의 무덤이 있다.
(중략)
세간에서 현재의 정몽주 무덤 자리 선정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가족들은 처형된 정몽주의 시신을 수습하여 개성에서 고향인 경상도 영일 땅으로 운구를 한다.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을 지나가던 중이었다. 그때 喪主의 두건이 바람에 '휘익-' 날려 저만치 떨어졌다. 두건을 주우려고 가보니 그곳이 명당이었다. 고향까지의 운구를 중단하고 그곳에 모셔 오늘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이것은 史實과 다르다. 포은의 시신은 처음에 해풍군에 안장되었다. 10여 년 뒤인 1406년(태종 6년)에 현재의 자리인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 능원리 文秀山아래로 옮긴다.
풍수지리학적으로 이곳이 명당이었음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서도 드러난다.
이곳으로 이장된 지 200년 뒤인 서기 1600년(선조 33년)의 일이다. 선조 대왕의 부인 의인 왕후(懿仁王后)가 죽었으나 오랫동안 능을 정하지 못하였다. 조정에서는 지관들로 하여금 좋은 자리를 찾아서 보고케 하였다. 이때 포은의 무덤 자리도 명당으로 보고가 되어 자칫하면 왕실에게 빼앗길 뻔하였다. 그때 선조 대왕이 "정몽주의 묘가 쓰기에 합당하다 할지라도, 어찌 忠賢의 후골(朽骨)을 20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파내게 하겠는가? 특별히 보지 말라."하여 파묘를 면하였다. 당시 지관들 사이에서도 이곳을 훌륭한 명당으로 보았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증명해주는 대목이다.
그보다 훨씬 전인 1456년(세조 대왕 2년)때의 일이다. 포은을 奉祀하던 손자 정保가 死六臣 사건에 연루된다. 세조가 정保를 환열형( 裂刑: 양다리를 각각 수레에 묶은 뒤 수레를 양편으로 밀어 몸을 찢어 죽이는 형벌)에 명하면서 도대체 어떤 사람이냐고 좌우 신하들에게 물었다. 신하들이 '정몽주의 손자이다'라고 하자 사형을 중지시키고 귀양을 보냈다. 이뿐만 아니라 정몽주 후손은 조선조의 역대 왕들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았다. 세금이 면제되거나 땅을 하사 받거나 혹은 벼슬을 하사 받기도 하였다.
풍수지리학적으로 살펴볼 점은 현재의 정몽주 무덤과 그 옆에 있는 손녀 사위 이석형의 무덤이 대표적인 유혈(乳穴)이라는 점, 그중에서도 보기 드물게 雙垂乳穴에 속한다는 점이다. 또한 지금으로부터 600년전의 풍수지리 흐름을 파악하는데 좋은 참고가 되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흔히 요즈음 알듯모를듯한 현란한 술수로 범벅 칠을 한 풍수들은 무덤의 좌향(방향)을 辰戌丑未(24방위 중 남동, 북서, 북동, 남서에 가까운 방향을 가리킴)로 향한 산들은 胞胎法상(易術에서 상용되는 이론 중의 하나) 나쁜 방향(墓宮, 혹은 庫藏宮으로 표현)으로 보아 무덤을 써서는 안된다고 한다. 그러나 정몽주 무덤의 좌향은 진좌임을 보면 그 당시에는 이렇게 현란한 술수가 없었음을 엿보게 한다. 명당의 구비 요건인 龍(산), 穴(혈장, 당판), 砂(청룡, 백호, 안산, 조산), 水가 모두 격에 부합된다. 따라서 명당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 답산을 권해 보고 싶은 곳이 이곳이다.
◐정몽주 묘소 방문기 [TOP] 백골(白骨)이 진토(塵土)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 정몽주 묘소에 다녀와서 -이혜순(용인시 백암중학교)
[ 2001년 7월 10일 비]
오늘내일 사이에 장마가 다시 올라온다는 소식을 며칠 전부터 듣고 조금 걱정스러웠지만 다행스럽게 오전 내내 흐리기만 했다. 다니기에는 오히려 이런 날이 좋으리라 생각하면서 정몽주 묘소가 있다는 용인시 북부에 위치한 모현면 능원리 쪽으로 차를 몰아 갔다. 서울에서 내려오시는 선생님과 언니에게 백암순대를 맛보여드리고 싶은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지만 순대집 앞에 차를 세울 자리가 마땅치 않아서 머뭇거리다가 언제일지도 모르는 다음으로 기회를 미루면서 그냥 떠났다. 여느 때 같으면 오후 수업을 시작했을 시간에 이렇게 학교도 집도 아닌 곳으로 가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들뜨기에 충분할 터인데, 행선지인 정몽주 묘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은 여고 3년 내내 내 마음을 설레게 했던 고 1때의 담임 선생님이시니.
용인시내를 지날 무렵부터 빗방울이 한두 개씩 떨어졌다. 미리 정몽주 묘에 관한 자료와 지리를 알아두었는데 아침에 서둘러 나오느라고 그만 지도를 놓고 나왔다. 할 수 없이 지도책 들여다보았던 기억만을 더듬어 찾아가려니 긴가 민가 미심쩍을 때가 많았지만 이정표를 살펴가며 모현면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모현면의 지형이 가운데 부분이 가늘어지면서 동서로 나누어져있어서 이정표와 지역 경계표가 헷갈렸다. 아직 능원리를 찾기도 전에 광주시가 나와서 이상하다 생각하며 가다보면 다시 용인시가 나오니, 가기는 가면서도 가는 길을 망설이게 됐다.
혹시라도 이미 지나쳐 온 것은 아닌지 염려가 되어 큰 맘 먹고 길을 물으니 지도책을 펼쳐가며 친절하게 길을 안내해 주었다. 다행히 지나쳐 온 것은 아니었지만 시계를 보니 예정 시간인 두 시가 다 돼가고 있었다. 어쩌면 먼저 와 계실지도 몰라. 늦을까봐서 조금씩 조바심을 치며 능원리에 가까워졌을 때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정몽주 묘소를 안내하는 이정표가 나왔다. 좁다란 시골길을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들어가는 길이 아주 좋았다. 길가에는 예쁜 카페와 음식점들도 많이 들어서 있었다. 포은 선생의 묘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서 이렇게 묘 입구가 번성했는가.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니 묘는 안 보이고 골프장만 보였다. 그러면 그렇지. 골프장으로 들어오는 길 바로 전에 있던 작은 다리를 건넜어야 했다는 얘기를 듣고 돌아 나오자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큰 다리를 건너 다시 작은 다리를 건너니 마을 안으로 좁다란 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여기가 바로 능원리 안골마을이었다.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니 길 왼쪽으로 크고 작은 무덤과 비석들이 보였다. 차를 세워놓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주차장으로도 쓰는 것 같아 보이는 공터에는 농구대만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연일정씨 포은공파 묘역원>이라는 안내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정몽주 묘소가 있는 곳이 틀림없는 것 같은데, 안내도도 이정표도 없으니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길 따라 조금 위쪽으로 <등잔박물관>건물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서 그 쪽은 아닌 것 같기에 산자락 안쪽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들어가 보니 기와집과 주차장이 있는 산 위쪽으로 커다란 묘가 보였다. 이젠 확실하게 찾아온 것을 알 수 있었다. 낯간지러운 사전 답사를 끝내고 다시 차 세워 둔 곳으로 돌아오니 이젠 비가 제법 많이 내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빗줄기 속으로 무슨 신호라도 보내는 것처럼 헤드라이트를 반짝거리며 선생님의 차가 다가왔다. 클릭만 하면 홈페이지로 들어가서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인지 두 달만에 뵙는데도 어제 뵈었던 것처럼 편안했다. 선생님 차에 같이 타고 정몽주 묘소가 있는 산자락 안쪽의 길로 들어갔다. 비가 많이 쏟아지고 있어서 내리기를 조금 망설이면서 쉬는 사이로 장사익의 노래 <찔레꽃>이 흘렀다. 맑은 아침도 순식간에 처연하게 만들어버리고 마는 그 절절한 목소리 !
이혜순과 이선옥, 우산 속의 청초한 웃음으로 정다웠다.
무작정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우산 두 개를 셋이서 나누어 쓰고 비가 계속해서 내리고 있는 산자락을 올랐다. 작년부터 묘역 정비 공사를 하고 있다더니 묘역 주변에는 키 큰 나무들이 쓰러져 있었고, 새로 심은 잔디들은 아직도 서로 친해지지 못해서 네모난 뗏장 모양인 채로 거리를 두고 사이사이로 흙을 드러내고 있었다. 샛노란 원추리꽃이 비안개 옅게 깔린 숲을 더욱 싱그럽게 해 주고 있는 길 없는 길을 따라 묘소에 올라 나란히 서서 고개를 숙였다. 무슨 생각을 했던가. 이 자리가 마음에 드시느냐고 여쭈었던가.
고려말 충신인 정몽주의 묘소는 본래 개성의 풍덕에 있었다. 그가 선죽교에서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에 의해 피살(1392년)된 뒤, 태종 6년(1406년) 3월에 풍덕에 초장하였던 묘소를 현재의 위치인 모현면 능원리 문수산 기슭으로 옮겨 부인 경주이씨와 합장한 것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 천묘를 할 때에 천묘 일행이 능원리 근처에 이르자 갑자기 바람이 불어 앞에 세운 명정(銘旌)이 날아가 버렸는데, 당황한 일행이 찾아가 보니 보기 드문 명당인지라 그냥 그 자리에 이장하였다고 한다. 또 듣기로는 명정이 날아갔을 뿐만 아니라 상여가 움직이질 않았다고도 하니 이 자리와 인연이 깊기는 깊었나 보다.
포은 선생의 묘소는 단분(單墳)으로, 상석·혼유석·향로석·망주석·문인석 등이 종전부터 있었으며, 곡담과 호석, 난간석 등은 1970년에 추가로 설치한 것이다. 1972년에 지방 문화재 기념물 제 1호로 지정되었다. 1980년에는 묘역의 민가 3채를 이전하고, 신도비각·재실(齋室) 등 대대적으로 정화사업을 실시하였다.
포은의 묘역에는 묘표와 신도비가 전하는데 묘표는 조선 중종 때에 태학생들이 포은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중종에게 청원하여 세운 것이라 하는데, 조선조에 비석을 세웠음에도 전면에 「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처음 세울 때 조선의 직함이었던 영의정을 추증하여 무덤 옆에 세웠더니 곧 벼락이 쳐서 비석을 부숴버리는지라 고려의 문하시중으로 고쳤더니 지금까지 무사하다는 일화가 전한다.충신의 고고한 절의가 사후에도 청청히 살아있음이렸다 .또한 신도비는 조선 숙종 때에 세웠는데, 현종 때의 문신 김수증(金壽增)이 썼고 글은 송시열(宋詩烈)이 지었다 한다.
[왼쪽 아래로 1980년에 지은 재실 영모재(永慕齋)가 보인다.]
묘를 볼 때에는 묘 앞에서 묘와 묘를 둘러싸고 있는 산을 올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묘 소 뒤쪽에서 아래로 내려다보아야만 그 자리가 얼마나 좋은 자리인가를 알 수 있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포은 선생이 누운 자리 앞에 서서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안골마을은 워낙 골이 깊어 보이지 않고, 뽀오얀 비안개가 옅게 깔려있는 산숲만 선경(仙境)인 듯 그윽하게 푸르렀다. 기울어져 가는 고려왕조를 지키려다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포은 선생은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너그러워지고 고즈넉해질 그 풍경 때문에라도 이제 신선이 되어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포은 선생의 묘소와 비슷한 모습으로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묘소가 있었다. 연일 정씨 묘역 한 쪽을 그렇게 크게 차지하고 있는 게 과연 누구일까 궁금해져서 건너가 보니 저헌(樗軒) 이석형과 부인 연일 정씨를 합장한 묘였다. 그렇다면 처가살이? 옛말에 겉보리 서 말만 있어도 처가살이는 안 한다는 말이 있는데, 도대체 무슨 사연일까? 나는 그저 예사롭게 보고 지나치려는데 선생님께서는 아무래도 알아내고 말아야겠다는 표정이시더니 결국 묘소 아래에 있는 관리인 집인 듯한 기와집으로 성큼 앞서 들어가셨다. 대문 안쪽에 대고 큰 소리로 말을 건네면서 문간에 선 채로 자연스레 알아내게 된 사연은 아주 새롭고도 재미있으면서 또한 놀라운 이야기였다.
포은 선생의 묘소를 명당자리인 이곳 문수산 자락으로 이장하기로 한 바로 전날 밤에 선생의 시집 간 손녀가 밤새 웅덩이를 파고 바가지로 물을 퍼 날라다 부어서 물이 나는 곳인 것처럼 위장을 함으로써 원래 명정이 날아갔던 바로 옆자리에 선생의 묘를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친정 할아버지가 묻힐 자리가 명당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시샘하여 빼앗은 것이다. 그리하여 포은 선생이 명당자리 옆의 명당자리에 묻힌 후 손녀사위가 조상들의 묘를 이 산으로 옮기고 자신은 원래의 명당 자리에 묻히게 되었으며 그 뒤로 집안이 대대로 고위관직에 오르며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었다고 한다. 아무리 시집가면 귀신도 시집귀신이라지만 억울하게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쉬실 자리까지 탐을 내어 빼앗다니. 요즘에도 가장 무서운 것이 아줌마들이라고 하더니 조선시대의 아줌마들도 만만치 않았었나 보다.
지금도 포은의 묘소는 연일정씨 포은공파의 종손에 의해서 잘 돌보아 지고 있으며 해마다 서너 차례의 시제를 지내는데 그 중에서 가을에 모셔지는 시제는 그 규모가 워낙 방대하여 방속국에서 헬기를 동원하여 촬영해 갈 정도라고 한다. 또한 포은의 묘소를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모현면 능원리는 연일정씨 포은공파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어쨌든 이 고장의 지명도 원래는 쇄포면이었으나, 포은 선생의 묘소가 능원리 문수산에 모셔진 후로 충현을 사모한다는 뜻에서 1411년부터 모현(慕賢)면이라 부르게 되었다니 두고두고 포은 선생을 모시고 기리며 살아야 할 땅이다.
이런 저런 얘기를 들은 후 돌아 나오려는데 아무래도 단심가비(丹心歌碑)가 이곳 어딘가에 있을 것 같아서 찾아보았으나 묘역 주변에는 물론이거니와 신도비각이 있는 묘역 입구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얘기해 주었던 마을 주민조차도 단심가비가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찾아간 자료의 내용과는 다르게 원래 이곳에 없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포은 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는, 묘소에서 좀 떨어져 있는 충렬서원에도 가 보았으나 비가 와서인지 일찌감치 문이 닫혀 있어서, 서원의 뜰 어디에라도 있을지 모르는 시비(詩碑)를 찾아보려던 계획마저도 문 밖에서 포기한 채로 돌아서 나오고 말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능원 안골 마을을 그냥 나오기가 아쉬워서 가까이 있는 등잔 박물관에도 들러보았으나 휴관하는 날이었다. 마침 박물관 관장 할아버지를 만나서 등잔을 모으게 된 얘기와 박물관을 열게 된 사연 등을 우산을 받치고 마당에 선 채로나마 듣고 나올 수 있었다. 그렇지만 등잔박물관은, 관람하지 못한 채로 그냥 돌아 나오기에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곳이었다.